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한참 전의 기억이 마치 몇 년 전 일처럼 생생할 때가 있다. 1975년 여름 할머니 손을 잡고 갔던 광화문 국제극장이었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한뉴스와 영화 본편 사이에 틀어주던 10분 남짓 분량의 정부 홍보용 ‘문화영화’만큼은 거의 모든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공포스러운 장면이 커다란 스크린 위에 흘렀기 때문이다. 몇 달 전인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된 뒤 배를 타고 피란하는 월남(남베트남)의 ‘보트 피플’이 화면에 등장했다. 주변국 해변에 상륙하려 했으나 입국을 거절당하자 스스로 배를 침몰시키고 온몸이 젖은 채 육지로 기어나오는 실제 영상이었다.

1975년 배를 타고 피란하는 베트남 난민.

카메라는 두 손이 닳도록 빌고 굽신거리며 ‘제발 우리를 받아달라’고 읍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그들이 울부짖는 표정을 보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듯했다. ‘배달의 기수’ 톤의 비장한 내레이션이 그 위로 흘렀다. “보라~ 이들의 모습을! 보라~ 이 비참한 광경을!”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돼 전쟁의 참화를 겪던 베트남이, 공산 진영인 월맹(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됐다는 사실은 유신 시대를 살아가던 어린이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충격이었다. ‘이러다 아시아가 다 공산화되겠구나! 우리도 곧 전쟁이 난다면 저렇게 될 수 있다. 아니, 당장 며칠 뒤에라도 저 꼴이 나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대학에 들어간 뒤 그때의 일이 간간이 생각났지만, 이젠 ‘북한이 남침하려 한다는 건 남한 정부의 대국민 선전일 뿐’이라는 운동권 논리가 솔깃하게 들렸던 탓에 ‘괜한 걱정을 했다’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 생각이 다시 바뀐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그 공포가 진짜였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바로 그 1975년에 북한의 김일성이 재남침(再南侵)을 계획하고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구 동독의 외교전문에서 확인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최근 출간된 정종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의 단행본 ‘저우언라이(周恩來) 평전’(민음사)에 당시의 상황이 서술돼 있다. 김일성은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베이징을 방문했다. 사이공이 함락돼 베트남전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한 지금이야말로 한반도 적화통일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5년 4월 18일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 마오쩌둥 자택에서 만난 마오쩌둥(왼쪽)과 김일성.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난 김일성은 적화통일에 대한 소신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요청이 관철된다면, 잃어버릴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는 것은 통일이 될 것입니다!” 다시 남침을 할 테니 군사 지원을 해 달라는 얘기였다.

마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말을 꺼냈다. “나는 이미 늙어서… 현안 문제에선 손을 놓았소. 여기 이 사람과 자세한 얘기를 해 보시오.” 마오가 가리킨 체구 작은 사람은 배석해 있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김일성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2인자인 총리 저우언라이도 만났는데, 병이 깊어 입원한 저우는 몸무게가 36킬로그램일 정도로 쇠약해 있었고 ‘통일’ 문제를 길게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저우 역시 배석해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또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과 김일성

덩샤오핑의 말은 김일성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중국은 이미 혁명의 깃발을 내려놨습니다. 이제는 경제 건설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고 있지요. 조선의 통일 노력은 지지하지만 비평화적 방법은 곤란합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 뒤 펼쳐진 미·중 화해 무드 속에서 이미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마스터플랜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이뤄졌던 한반도의 화해 무드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었다. 1974년 8월에는 한국 대통령 저격 미수와 영부인 암살 사건이 북한에 의해 일어났고, 1975년 김일성은 ‘인민군 전투력 강화 5대 방침’을 제시했다. 이듬해 발생한 판문점 8·18 도끼만행 사건은 남침 계획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민감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6년 8.18 도끼만행 사건.

결국 1975년은 대단히 위험한 해였고, 월남 패망으로 인한 공포가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멈출 수 없다. 만약 노쇠한 마오쩌둥이 정신줄을 놓고 김일성의 설득에 넘어갔다면? 죽음을 앞둔 저우언라이가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의리’를 지키려 했다면? 1975년 이전에 덩샤오핑이 4인방에 의해 제거됐더라면? 한반도에서 또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승패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한 중화학공업화는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19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거나 전쟁고아가 됐을 것이고, 대부분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 게다.

1970년대 한국의 유신 정부는 분명 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하는 교육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반공교육만큼은 그 중 많은 부분이 결국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우리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반대로 북한을 믿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북한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