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미군정 자문기관이던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창덕궁 앞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그는 오랜 기간 야당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사상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기자를 지냈고 1980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특별보좌역으로 11·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과 원내총무를 역임했습니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손세일(1935~2024) 전 국회의원은,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김구 전기인 7권 분량 ‘이승만과 김구’의 저자로 더 기억됩니다. 본인 역시 “잠깐 정치를 했던 것일 뿐”이라고 회고한 적도 있습니다. 정계 은퇴 후 2001년부터 12년에 걸쳐 월간조선에 원고지 2만3000장 분량의 이 글을 연재했고, 2015년 권당 800쪽에 이르는 학술서로 출간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전 7권)의 저자인 손세일(89·사진) 전 국회의원./고운호 기자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무척 중요한 두 거인(巨人)의 삶과 사상을 비교하며 서술해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정리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적이 아닌 협력자였고 대한민국을 만든 두 국부(國父)였다. 두 사람은 1948년 남북협상 과정에서 의견을 달리했지만 독립운동 내내 협력적 관계였고, 애국심, 반일, 반공, 기독교 사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이름을 나란히 하고 그들을 합친 민족주의의 봉우리에 올라가야만 한국의 미래를 볼 수 있다.”

2008년 ‘이승만과 김구’의 첫 세 권이 출간됐을 때 서울 마포에 있던 그의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벌써 17년이나 지났군요. 그때 대략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이 지니는 상징성은 너무도 다르게 각인돼 있습니다.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는 것이 자신의 이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건 크게 잘못됐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3·1 운동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공화주의(共和主義)가 제도화됐고, 그 결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습니다. 그 임정의 첫 임시대통령이 이승만이었고, 마지막 주석이 김구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광복 이후 한국 내셔널리즘의 원천이자 국부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또 있었습니까.

“20~30대 시절 5년 넘는 혹독한 감옥살이를 통해 ‘정치적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는 점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일반 사회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했고, 김구에게 감옥은 자신을 저항적 민족주의의 강철덩어리로 만들어 낸 불가마와도 같았습니다.”

-보통 정치적 적대 세력이었던 것으로 인식하는데요.“두 사람은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의 정국에서 대단히 협력적인 관계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애국심의 소유자였으며, 자유주의와 반공주의 사상에 투철했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같았습니다. 다만 김구의 서거 직전인 1948년의 남북협상 과정에서 입장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달랐던 점을 좀 말씀해 주시죠

“이승만이 좀 더 국가주의적이었고 김구는 조금 더 민족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에게 있었던 철저한 국제 인식과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이 김구에게는 부족했습니다. 반면 김구에게 있었던 관용의 정신과 스스로 대중을 대변하는 모습은 이승만에게선 아쉬운 부분이었어요.”손 전 의원은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하고 그들을 합친 내셔널리즘의 봉우리에 올라가야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인물도 드물어졌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국부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국가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에서 국수를 먹으면서 이런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현대사 논쟁을 바로잡으려면 백범 김구를 확실히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안아야 하고, 우남 이승만과 백범의 후손이 화합하는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서 시간이 갈수록 백범기념사업회가 정부 비판 인사로 기울고, 백범 행적이 반(反)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간곡히 진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YS는 딱 한마디 반응했다고 합니다.

“에이~ 이승만 독재자래이, 독재자.”

김구에 대해선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 전 장관은 “오늘 이 땅 이념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극좌 대 극우, 친북 대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이른바 주류 내의 철저하지 못한 자기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가 1948년 정부 수립 국면에서 아주 잠깐 등졌던 것이라면,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인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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