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하! 하!”
‘그분’을 떠올리면 귓가에 웃음소리부터 들리는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10일 96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한 프랑스 출신 두봉 주교님입니다. 주교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젠 저 어린아이처럼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기쁨과 감사를 나눠주었던 성자(聖者) 한 명이 또 우리 곁을 떠난 것이지요.
선종 이튿날인 4월 11일 천주교 안동교구는 두봉 주교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습니다. 주일이었던 지난 4월 6일 뇌경색이 왔고, 다행히 방문 중이던 교우들이 있어서 바로 안동병원으로 옮겨서 시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과도 좋아서 10일 오후에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지요. 일반병실로 옮긴 후에는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병실을 지키던 안동교구 사무처장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사무처장 신부가 “후련하시지요? 이제 아무 걱정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주교님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교구청 사제와 간병인들에게도 감사하다고 했다고 하고요.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어 특유의 몸짓을 지어 보이셨답니다. 이렇게 상태가 좋았지만 이후 오후 4시쯤부터 급격히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기력이 떨어졌답니다. 오후 7시쯤 교구장과 교구청 사제들이 임종을 돕는 기도를 올렸고, 오후 7시47분 두봉 주교는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안동교구가 전한 마지막 모습에서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감사합니다” 였던 것입니다.
제가 주교님을 만난 것은 2023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경북 의성의 ‘문화마을’에서였습니다. 그가 노년을 보낸 사제관이지요. 활짝 열린 대문에는 ‘천주교회 두(杜) 봉(峰)’이라고 적은 작은 문패가 걸려 있었지요. 두봉 주교가 혼자 사는 이곳에 들어서자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저 “하! 하! 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 하! 하!’는 점심 식사 시간을 포함해 제가 약 2시간 반 정도 머무는 동안 수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봉 주교님만 떠올리면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옵니다. 당시 기사에도 썼지만 ‘기뻐서 웃는지, 웃으니 기뻐지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날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웃음 소리였고,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감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보행보조기를 밀면서 방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얼마 전 대만에서 열린 사제 모임에 참석했다가 계단을 헛디뎌 낙상하는 바람에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현지에서 수술까지 받고 귀국했다고 했지요. “큰일 날 뻔 하셨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더 크게 안 다친 게 다행이고, 당뇨 고혈압 같은 성인병도 없어 다행이고, (체중이)가벼워서 잘 나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으니 다행이라며 “감사하다”고 했지요.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수술실에 들어갔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하! 하! 하!” 웃었습니다.
2023년은 두봉 주교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7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선종 후 그의 삶을 시기별로 생각해 봤습니다. 고향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은 25년. 그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은 다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고등학교 이상 공부한 것은 그가 유일하다지요. 1953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54년, 25세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15년은 대전에서 보냈지요. 대전교구에서 사목했던 그는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구(分區) 되면서 초대 교구장을 맡았지요. 만 40세 때입니다.
안동교구장으로 지낸 시간은 21년입니다. 안동교구장에서 퇴임한 때는 1990년. 교황청에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며 네 번이나 ‘사임 청원서’를 보낸 끝에 허락받은 은퇴였습니다. 교구장 시절, 그는 작은 체구에 외국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안동문화회관, 농민회관을 지었고, 갓 쓰고 한복 입고 농민들 잔치에도 어울렸습니다. 농민과 광부 등 어려운 형편의 이들을 위해 대신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오원춘 사건’을 겪으며 유신 시절 정부와 맞서기도 했지요.
그가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했을 때 나이는 61세. 아직 펄펄 날아다닐 수 있었지만 그는 철저한 은퇴를 택했습니다.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주기 싫다’며 아무 연고도 없는 행주산성 밑으로 떠났습니다. 가건물 공소(公所)에서 14년을 지내던 그는 2004년 안동교구로 돌아옵니다. 후임 권혁주 주교의 간청에 따라 의성 ‘문화마을’로 돌아온 것이지요. 문화마을에서 보낸 기간도 21년입니다. 그동안 그는 인기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특히 TV예능(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해 유쾌한 모습을 보여준 이후로는 모르는 사람, 다른 종교 사람들도 불쑥불쑥 찾아왔답니다. 그래도 그는 특유의 웃음으로 그들을 맞아 다과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선교해야 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니 감사한 일”이라며 또 “하! 하! 하!” 웃었습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때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12월 19일이었습니다. 무척 추웠지만 사람들 마음은 따뜻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네 명이 함께 왔는데 제가 인터뷰하던 2023년 12월 당시 두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두봉 주교와 한 살 위의 선배 백요한(본명 쟝 블랑) 신부님 두 분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백 신부님은 대전교구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봉 주교님은 본명이 뒤퐁(Dupont)이지요. 뒤퐁 발음을 따서 ‘두봉’으로 한국어 이름을 짓고, 백 신부님은 흰색이란 뜻의 ‘블랑(Blanc)’이란 성(姓)의 뜻을 따서 ‘백’씨로 한국어 이름을 지은 것 아닌가 싶네요.
두봉 주교님은 백 신부님과 매년 12월 19일 자신들이 한국에 도착한 날 무렵이면 서로 전화 통화를 한다고 하시더군요. 마침 성탄을 앞둔 때이니 연말 인사도 나누곤 했겠지요. 제가 인터뷰를 위해 찾았던 날이 12월 13일이었는데요, 그날 아침에도 백요한 신부님과 통화를 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한 살 위의 백요한 신부님도 작년에 선종했습니다. 이번에 두봉 주교님마저 돌아가셨으니 1954년 같은 배로 한국에 도착했던 네 명의 사제는 이제 모두 돌아가신 것이죠.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주교님은 “성직자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 힘을 주는 직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부님은 그렇게 기쁨과 행복, 힘을 나눠주며 70여년을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심지어 그날 인터뷰 때 사진을 보면 두봉 주교님이 성탄트리 앞에서 산타 인형의 손을 잡고 흔드는 포즈인데요. 사진 기자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신 결과입니다. 성탄절 특별 인터뷰이기 때문에 사진에서도 성탄절 분위기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교님을 만나러 갔는데 마침 응접실에 성탄 트리도 있고, 산타 인형도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말씀을 드렸는데 주교님은 흔쾌히 허락하시고 산타 인형을 안더니 특유의 환한 미소까지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교구장까지 지낸 원로 성직자라면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사진 포즈를 거절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두봉 주교님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즈를 취해주시더군요.
주교님은 ‘행복을 누리는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남들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면 돼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남들에게 행복을 주면 자기가 행복을 누리게 돼요. 아주 묘한 그런 행복을 누리게 돼요. 내가 행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남들에게 행복을 주면 반사적으로 내가 행복을 누리게 돼요.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돼요. 이건 제 체험이기도 해요.”
그러면서 ‘감사’를 길어 올리는 자신만의 비법을 알려줬습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갖는 ‘주님의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의 시간’은 두봉 주교님이 붙인 이름인데요, ‘하느님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시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다 알고 계시고, 무슨 부탁을 드려도 다 알고 계시고,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이끌어주시고 봐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좋아요. 아무런 생각 없이 빈손, 빈 마음으로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시간입니다.”
이런 ‘주님의 시간’을 통해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기쁨과 사랑, 감사를 충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나눠준 행복 덕분에 자신도 매순간 행복했던 것이 아닌가 싶고요.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은 감사, 행복, 기쁨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14일 장례미사에서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고 일깨워 주신 두봉 주교님,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의 생각도 같을 것 같습니다. 주교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