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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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1969년 7월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직후 동료 우주인 에드윈 올드린이 달 표면에 서 있는 역사적인 모습을 촬영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but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 우주인이었던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으면서 남긴 이 말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우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섰던 버즈 올드린, 달 궤도선을 조종했던 마이클 콜린스의 이름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폴로 우주선이 몇호까지 있었는지, 아폴로 11호 앞뒤의 우주선과 우주인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업적을 달성했는지를 세세하게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누구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폴로 11호의 성공에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수많은 연구자와 엔지니어, 우주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올해 1월3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월터 커닝햄(Ronnie Walter Cunningham) 역시 아폴로 계획의 조연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10월11일 발사됐던 아폴로 7호 우주인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커닝햄과 동료가 가진 ‘최초’의 타이틀이 있습니다. 아폴로 7호가 최초로 성공적으로 발사된 유인 달탐사선이었기 때문입니다.

NASA는 커닝햄이 없었다면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불가능했다고 평가합니다. 빌 넬슨 NASA 국장은 “커닝햄은 전투기 조종사였고 물리학자였고 기업가였으며, 특히 탐험가였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그를 애도했습니다. 거대한 아폴로 계획의 핵심 징검다리였던 커닝햄과 아폴로 7호는 어떤 일을 해냈을까요.

최초의 달 탐사 유인 우주선 ‘아폴로 7호’의 승무원 월터 커닝햄/NASA

◇아폴로 1호의 비극

아폴로 7호는 옛소련에 빼앗긴 미국의 자존심을 되찾는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등 우주개발의 이정표마다 소련에 뒤져 있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아폴로 계획을 들고 나온 것도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하지만 아폴로 계획은 출발부터 비극이었습니다. 1967년 1월27일 플로리다의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AS-204라는 미션이 진행됐습니다. 테스트를 위해 우주인 3인이 탑승해 있던 사령선에서 화재가 발생해 거스 그리섬,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 모두 숨을 거둡니다. 사령선 문을 여닫는 부분의 전선 피복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초 이 테스트는 아폴로 1호 개발을 위한 과정이었지만 NASA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이 테스트 미션을 아폴로 1호로 명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당초 아폴로 계획 넘버링이 꼬이면서 아폴로 2호와 아폴로 3호는 실제로는 진행되지 않은 미션으로 남습니다.

아폴로 4~6호는 무인 미션이었습니다. 세 번 모두 아폴로 계획의 상징이었던 새턴V 로켓과 아폴로 우주선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시험 발사였습니다.

◇미국을 다시 희망으로 물들인 아폴로 7호

커닝햄은 1932년 3월 아이오와주 크레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투기 조종사를 꿈꿨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날아가는 소리만 듣고도 어떤 비행기인지 맞출 정도로 심취했다고 합니다. 1951년 해군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고, 54차례 야간 전투에 출격했습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우주인이라는 직업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1961년 5월5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합니다. NASA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당시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 앨런 셰퍼드 주니어가 우주를 향해 떠나는 중계를 자동차 라디오로 듣고 있었다”면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너무 흥분해서 더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NASA 우주인에 지원했고 1963년 채용됐습니다. 그리고 5년 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아폴로 7호였습니다. 아폴로 7호는 폭발과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끝난 아폴로 1호 이후 처음으로 진행되는 유인 미션이었습니다. 월터 쉬라 주니어가 조종사를, 돈 에이실이 항해사를 맡았고 커닝햄은 달착륙선 조종사였습니다. 쉬라는 해군 대위, 에이실은 공군 소령 신분이었고 커닝햄은 유일한 민간인이었습니다.

커닝햄은 우주전문 사이트 콜렉트 스페이스에 “아폴로 조종 모듈은 사람이 조작하기 위해 만든 기계 가운데 가장 복잡했다”면서 “우주선 시스템을 시험하고, 작동 절차를 확인하고, 전 세계 추적 네트워크의 정상 가동까지 살펴야 하는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시험 비행이었다”고 했습니다. 탑승한 우주인들 입장에서는 아폴로 계획에 계속 참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시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상 첫 우주 생중계

월터 커닝햄이 1968년 아폴로 7호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NASA

아폴로 7호는 우주에서 꼬박 11일을 보냈습니다. 지구를 163바퀴 공전했고, 안전하게 대서양 바다로 귀환했습니다. 아폴로 계획으로 사람을 안전하게 우주로 보낼 수 있고, 다시 귀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겁니다.

커닝햄은 2017년 “우리는 아폴로 1호 화재로 인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고, 가장 긴 시간 동안 매우 성공적인 시험 비행을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1977년 회고록 ‘올 아메리칸 보이즈’에서는 “21개월 전에 우리가 발사된 그곳에서 팀원 3명이 사망했다”면서 “우리의 목적은 기술적인 뿐만 아니라 심리적 장벽도 넘어야 했다”고 썼습니다.

아폴로 7호에는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시도도 했습니다. 우주인은 TV 카메라를 우주에 가져갔고 이들의 활동은 미국 전역에 방송됐습니다. 이 공로로 아폴로 7호 우주인 세 사람은 에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월리, 월터 앤드 돈 쇼’로 불리는 일련의 방송에서 그들은 무중력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우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구인들에게 생생하게 알려줬습니다.

◇욕설에 날아간 달착륙의 꿈

아폴로 7호는 아폴로 11호와 거의 비슷했지만 달 착륙선이 없었습니다. 시험 성격이었기 때문이죠. 궤도 역시 지구를 도는 것으로 한정됐습니다. 아폴로 7호 우주인 세 사람은 당시 미션에 성공하면 실제 달착륙 계획에도 계속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발사대 앞에 선 아폴로 7호 우주인들 /NASA

우주에 있는 상태에서 쉬라가 먼저 감기에 걸렸고, 에이실이 옮았습니다. 커닝햄 역시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NASA는 이들에게 “감기로 인해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고막이 터질 우려가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방송에 모두 중계되는 마이크에 대고 이들은 관제사와 욕설을 주고받습니다. 방송 때문에 우주 미션을 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거나,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지구 재진입 시 착용해야 하는 가압 헬멧 착용을 거부하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쉬라는 “아폴로 7호 이후 NASA에서 은퇴하겠다”는 말도 내뱉습니다. 이 비행은 결국 쉬라 뿐 아니라 아폴로 7호 우주인 세 사람 모두의 은퇴 비행이 되고 맙니다. 당연히 다시 우주로 나가지도 못했고, 달에 가겠다는 꿈도 사라졌죠.

아폴로 계획의 비행 운영 책임자였던 크리스 크래프트는 회고록에서 “커닝햄과 에이실은 헬멧 문제에 대해 쉬라를 지지했고, 이는 그들의 집단적 ‘불복종’으로 간주됐다”면서 “이 우주인들은 다시는 비행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반면 커닝햄은 회고록에서 “쉬라는 선장이었고, 지상 관제사의 태도를 선장의 권위와 판단에 대한 도전으로 봤다”고 했습니다.

◇반세기 만의 달 귀환 꿈꾸는 NASA

아폴로 7호 귀환 이후 커닝햄은 미국 최초의 우주정거장을 개발하는 스카이랩 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우주인 피트 콘래드에게 이 자리를 내줬고 1971년 NASA에서 은퇴했습니다. 이후 금융 및 부동산 회사 고위 임원으로 일했습니다. 2012년에는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요 요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NASA에 보낸 전직 우주인 서한에 동참하며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커닝햄은 자신이 과학자라는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회고록에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물리학자이고, 우주에서 만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삶, 지구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계시는 없었습니다.”

커닝햄과 아폴로 7호 우주인들의 용기와 성공은 아폴로 미션의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아폴로 11호, 12호, 14호, 15호, 16호, 17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1972년 12월 아폴로 17호 이후 50년 넘게 아무도 달에 가지 않았습니다. NASA는 현재 아르테미스 미션을 통해 다시 사람을 달에 보내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커닝햄의 후예들이 찾아갈 달과 그 너머의 화성 탐사 과정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미지의 세계’라는 말처럼 우주는 항상 기대를 뛰어넘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