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공개된 볼보의 첫 전기 세단 ‘ES90’은 SUV(스포츠유틸리티차)의 전유물로 여겨진 요소가 대거 적용됐다. 트렁크가 뒷유리와 함께 열리는 ‘테일게이트‘, 뒷좌석을 접는 기능이 대표적이다. 트렁크 입구가 넓어 큰 짐을 실을 수 있고, 뒷좌석을 모두 접으면 적재 공간이 424L(리터)에서 733리터로 늘어난다. 지상고(지면부터 차체 하단까지의 높이) 역시 동급 세단 대비 높아 차체가 위아래로 커 보였다. 짐 로언 당시 볼보 최고경영자(CEO)는 “차량의 외형에 따른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며 “소비자들이 원하는 차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세단과 SUV가 점점 닮아가고 있다. 이전만 해도 세단과 SUV는 각각 도심과 험로 주행으로 수요층이 명확하게 나뉘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차에 다양한 기능이 탑재된 ‘만능 차량‘을 원하는 소비자가 많아진 영향 때문이다. 세단은 본래 트렁크가 뒷좌석과 분리돼 트렁크 입구가 좁은 차량을 가리키지만, 최근에는 트렁크가 뒷좌석과 연결돼 있어 큰 짐을 실을 수 있는 세단이 나오고 있다. 지상고가 높아 위아래로 큰 SUV의 특징을 세단에서 차용하는 반면, 앞뒤로 날렵한 세단의 디자인을 SUV에 적용한다. 내연차 대비 부품 수가 적고 구조가 단순한 전기차 시대에 접어들며 자동차 디자인의 자유도가 높아졌단 점도 이런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세단과 SUV 장점 합친다
기아가 지난달 출시한 첫 전기 세단 ‘EV4’는 기아에서 처음으로 SUV의 디자인 요소를 세단에 적용한 사례다. 루프 스포일러(공기 저항 감소를 위해 붙이는 날개)와 클래딩(바퀴 위쪽에 음영을 줘서 옆면에서 휠의 아치가 더 잘 보이게 하는 디자인)이다. 이 두 요소는 차량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으로 SUV에만 적용해 왔지만, 세단에 SUV의 역동성을 결합한 시도다.
반대로 세단 특유의 날렵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세단을 닮은 SUV도 늘고 있다. 테슬라가 지난 2일 국내에 부분 변경해 출시한 전기 SUV ‘모델Y’는 한층 세단에 가까운 인상을 갖게 됐다. ‘주니퍼’로 알려진 이 차량은 헤드램프 등 차량의 얼굴 역할을 하는 전면 부품들을 이전보다 낮은 위치에 부착, 날렵함이 더욱 강조됐다. SUV에 세단의 특성을 가미한 CUV(크로스오버 유틸리티차)도 속속 늘고 있다.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6′가 대표적이다. 회사마다 모양이 다르지만, 전고가 세단보다 높고 SUV보다 낮은 것이 특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SUV는 넓은 공간, 세단은 승차감이란 공식이 깨지면서, 많은 소비자가 평일엔 출퇴근하고 주말엔 가족과 함께 놀러 갈 수 있는 차량을 원하면서 생기는 변화”라고 했다.
◇SUV 일변도 시장 바뀌나
전기차 전환이 이런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기차는 부품이 내연차 대비 30% 안팎 적어 기본적으로 넓은 실내 공간을 지녔기 때문에, 세단도 SUV처럼 넓은 공간이 가능하다. 또, 전기차는 내연차 대비 구조가 단순해 디자인을 변경하는 게 과거보다 용이하다. 과거엔 세단과 SUV 등 차급에 따라 다른 플랫폼(기본 설계)이 필요했지만, 이젠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차량 형태 변화에 따른 개발 비용이 과거보다 줄고 개발 주기가 짧아졌다. 예를 들어 현대차의 중형 세단 ‘아이오닉6’, 준중형 SUV ‘아이오닉5’, 대형 SUV ‘아이오닉9’은 모두 같은 전기차 플랫폼(E-GMP)을 공유하고 있다.
자동차 시장조사 업체 카이즈유데이터 연구소에 따르면, 작년 국내 자동차 판매량(약 144만대) 중 SUV(약 81만대)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많은 글로벌 자동차 업체가 SUV 위주의 신차를 내놓으면서 세단의 특성을 결합하는 식으로 차별화를 꾀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업체 입장에선 시장의 주류이고 수익성이 좋은 SUV를 포기하기 어렵지만, 세단과 같은 날렵함을 원하는 소비자도 있기 때문에 둘의 장점을 섞은 차종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