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 연방 하원의원 출신을 미국 대관(對官) 업무를 총괄하는 워싱턴 사무소장으로 영입했다. 연방 하원의원 출신이 국내 기업에 영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 속에서 미국 시장에 공을 들이는 현대차그룹은 지난 연말 그룹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인 호세 무뇨스를 CEO(최고경영자)로, 전 주한 미국대사인 성 김 자문역을 사장으로 각각 선임한 데 이어 전직 하원의원까지 스카우트한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정부는 물론 국내 정·재계 인사 중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백악관에서 210억달러(약 30조원)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 정세 변화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여온 현대차 그룹의 대미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기아 공장 있는 도시 시장 출신
현대차그룹은 15일 드루 퍼거슨 전 연방 하원의원을 다음 달 1일부터 미국 정부와 의회를 담당하는 워싱턴사무소장에 선임한다고 밝혔다. 퍼거슨 전 의원은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조지아주에서 4선을 지낸 거물급 정치인으로 공화당 내에서도 대표적인 친(親)트럼프 인사로 꼽힌다. 트럼프 1기 땐 요직으로 꼽히는 공화당 하원 수석 부총무를 맡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 패했던 2020년 대선 결과 불복 소송엔 조지아주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기아 조지아 공장 가동을 앞둔 2008년, 공장이 있는 웨스트포인트 시장에 선출된 퍼거슨 전 의원과 인연을 맺었다. ‘유령의 도시’라고까지 불리던 웨스트포인트시의 인구는 기아차 공장 가동 후 80% 증가했다. 2019년 조지아 공장 10주년을 맞아 열린 행사에도 현대차는 퍼거슨 당시 의원을 초대하며 인연을 유지했고, 이번 영입으로 이어졌다.
현대차그룹은 과거 한국식 ‘하면 된다’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최근 들어 이른바 ‘미국 인맥’이 속속 자리를 잡으며 순혈주의가 깨지고, DNA가 확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퍼거슨 전 의원 영입에 앞서 지난해 사장으로 승진한 성 김 사장도 이 같은 변화를 이끄는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현대차그룹은 주한 미국 대사와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 등을 역임한 성 김 사장이 2000년대 초반 초임 외교관으로 한국에 왔을 때부터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에 대사로 왔을 때는 물론, 인도네시아에 대사로 있을 때도 현지 공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고 전했다. 현대차그룹은 한반도 전문가로 한국계인 성 김 사장이 2023년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물러나자, 그해 말 정의선 회장이 직접 나서서 자문역으로 스카우트한 데 이어 1년 만인 지난해 11월 대외 협력과 국내외 정책 동향 분석 등을 총괄하는 그룹 싱크탱크 수장을 맡겼다.
그룹 해외 대관 조직도 계속 강화해왔다. 2023년 8월 해외 대관 조직인 ‘GPO(Global Policy Office)’를 출범시킨 데 이어 같은 달 외교부 출신인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시작으로 정부와 학계 등에서 인재를 대거 뽑았다.
“외국인 경영진 늘어나며 현대차 체질 크게 달라져”
또 다른 숨은 인맥도 있다. 지난달 24일 정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면담을 성사시킨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주 주지사가 주인공이다. 공화당 정치인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랜드리 주지사가 루이지애나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현대차그룹 경영진의 백악관 행을 이끈 것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마이크 존슨 연방 하원의장, 스티브 스컬리스 하원 원내대표 등도 공화당을 움직이는 주요 정치인이다.
무뇨스 CEO 또한 현대차그룹의 변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무뇨스 사장은 2010년대 중반 닛산 북미 법인장으로 활약하며, 현대차·기아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현대차는 2019년 미주권역담당 사장으로 깜짝 영입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CEO에 전격 선임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는 과거 대표적인 한국식 기업이었지만, 외국인 경영진이 늘어나며 체질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 중요성 일찌감치 본 현대차
현대차그룹은 일찌감치 세계 자동차 시장을 이끄는 미국 시장의 중요성을 알고 현지 공장 건설 등을 추진했다. 수출 초기에는 싸구려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정몽구 명예회장은 ‘품질’을 강조하며 현지 진출을 이끌었다. 정 명예회장은 미국에서 앨라배마에 이어 조지아 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뒤인 2010년 “미국 시장은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최대 격전지다. 이곳에서 성공이 곧 세계 시장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미국 시장 비율이 내수를 역전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전체 판매량의 25.5%에 달하는 185만대(도매 기준)를 미국 시장에 판매하며 125만대에 그친 내수를 크게 앞섰다.
미국 시장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면서 정의선 회장 등 경영진의 미국 방문도 잦아지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코로나 시기 이후 거의 매달 미국을 찾아 현지 시장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판매법인은 물론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준공을 앞두고는 조지아 현장도 자주 찾았다”며 “딜러들과 만나 현지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 일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