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내달 초 시행령을 발표할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현행 파견법 사이의 모순 때문에 기업들이 사업 현장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하청 업체 근로자에게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원청 업체인 대기업 경영진이 처벌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파견법상 원청 업체는 하청 업체 근로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휘·감독할 수 없다. 대기업 원청 업체로선 하청 업체 직원에게 작업 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이,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만 지게 되는 것이다. 재계에선 “산업재해를 줄이겠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대기업을 처벌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이런 법령 부조화가 발생했다”며 “중대재해법이야말로 대표적 졸속 입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모순된 중대재해법과 파견법
최근 한 대형 건설사의 안전 담당 임원(부사장급)이 보직에서 물러났다. 내년 1월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주변에 “회사 일을 하다가 잘못도 없이 감옥에 갈 순 없지 않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다른 임원들도 이 보직을 꺼리는 바람에, 직급을 낮춰 후임자를 간신히 구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건설 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건설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하청 업체 소속인데 이 근로자들에게 산재가 발생하면 원청 업체인 대형 건설사 경영진이 구속될 수도 있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시공 능력 1~12위 업체의 건설 현장이 평균 270곳이나 되는데 본사 경영진이 어떻게 이 많은 현장 인부의 안전까지 관리하겠느냐”고 말했다.
건설업뿐 아니라 철강·조선 등 제조업 현장은 중대재해법이라는 규제 폭탄을 맞아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 법은 하청 업체를 포함해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영진에게 1년 이상 징역,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에 업무를 맡길 경우에도 사업장 내에서 중대 산업 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업장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기업은 하청 업체 근로자들에게 안전한 방식으로 일하라고 직접 지시할 수 없는 처지다. 파견법 때문이다. 파견법은 대기업이 파견 근로자를 지휘·감독할 수 있는 업종을 번역·통역·영화·연극 포함 32가지로 규정하면서 제조업과 건설업 등은 제외했다. 현재 대기업과 도급 계약을 맺은 하청 업체의 사업주만 하청 업체 소속 근로자에게 작업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즉 산재 발생 우려가 가장 큰 조선·철강·화학·건설 업종에선 대기업이 하청 업체 근로자에게 안전 수칙 준수조차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 근로자를 지휘하면 파견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한 화학 업체 관계자는 “설비 보수·점검 시 기계 작동을 멈춰야 한다는 안전 지침을 하청 근로자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제지할 수 없다”면서 “중대재해법 보완 입법 없이 내년부터 적용하면 경영진이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고 말했다.
◇하청 업체는 봐주고, 대기업만 처벌
중대재해법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과도하게 차별한다는 문제도 나온다. 50인 미만 사업체는 중대재해법 시행 시기가 3년간 유예되는데, 이 기간에도 하청 업체를 고용한 대기업은 중대재해법에 따라 처벌받게 된다. 유예 기간에 발생한 산업 재해에 대해 50인 미만 하청 업체 사업주는 면책을 받고, 지휘·감독 권한이 없는 대기업에는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중소 건설·제조 업체도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다. 한 건설 업체 관계자는 “공기 맞추기만으로도 여력이 없는데 법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안전 관리 대책을 어떻게 만들겠느냐”면서 “내년에 만약 사고가 나서 사업주가 구속되면 그냥 사업 접을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