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Joe Biden)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날인 올해 1월21일부터 백악관은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종이신문 배달을 재개했다. 2019년 10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절독(絕讀) 조치 후 1년3개월여 만의 반전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폭로 보도로 2018년, 2019년도 퓰리처상(賞)을 연이어 받은 두 매체를 포함한 미국 주류 미디어들은 올들어 구독 증가세 급감과 시청자 대거 이탈 같은 된서리를 맞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5월15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사저로 가기 위해 백악관 인근 엘립스 공원에서 뉴욕타임스(NYT) 종이신문을 들고 전용 헬기 마린원으로 걸어가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올해 들어 美 주류 미디어들 ‘내리막길’

이달 6일 공개된 NYT의 2021년 1분기 실적보고서를 보면, 올해 1~3월 신규 디지털 유료 가입자는 30만 1000명에 그쳤다. 이는 작년 2분기(66만 9000만명)나 4분기(62만 7000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분기 기준으로는 2019년 3분기 이후 가장 적다.

WP와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WP는 올해 2월 자사 홈페이지를 찾은 순방문자(Unique Visitor·UV)가 한달 전 대비 26% 감소했다고 밝혔다. ‘닐슨(Nielsen) 미디어 리서치’는 “올들어 CNN과 MSNBC 시청자가 작년 대비 각각 45%, 26% 줄었다”고 분석했다. 보수 매체로서 트럼프에 우호적이던 FOX뉴스가 6% 정도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이같은 고전(苦戰)은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유료 구독자와 시청자, 온라인 방문자 증가 같은 호황을 주류 매체들이 누리는, 이른바 ‘트럼프 효과(Trump bump)’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디지털 시대에 독자 감소 등으로 몰락해 가던 주류 전통 미디어들을 살려준 ‘구세주(救世主)’ 같은 존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 무대에서 내려온 뒤 CNN의 시청자 숫자가 급감하고 있다. 사진은 CNN 본사 모습/조선일보DB

그도 그럴것이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2016년 말 232만명이던 NYT의 디지털 유료 구독자는 작년 말 669만명으로 4년 만에 440여만명 늘었다. 온라인 뉴스 유료화 시작(2011년 3월) 후 구독자 100만명 확보에 4년 4개월 걸린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속도이다. NYT는 “2020년 한해에만 230만명의 디지털 유료 구독자가 순증(純增)했다”고 밝혔다.

◇CNN 시청자 절반 감소...NYT는 30만명 증가 그쳐

WP의 디지털 유료 독자도 트럼프의 대통령 재임 4년 동안 3배 증가해 작년말 300만명에 달했다. 2014년 약 280만명이던 3대 케이블 방송(CNN, FOX, MSNBC)의 프라임타임(prime time·황금 시간대) 시청자 수는 트럼프 집권 3년째인 2019년 530만명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 때문에 미국 정계와 미디어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주류 미디어들의 비공식 ‘최고 마케팅 책임자(chief marketing officer)’”라는 말이 회자됐다.

트럼프가 대통령 재선에 실패할 경우 미국 주류 미디어들이 다시 침체될 것이라는 관측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주류(主流) 미디어에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해온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주류 매체의 인정(認定)과 주목을 받으려 가장 애쓴 인물이다.

재임중 수시로 친(親)트럼프 언론인들과 직접 통화한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언론사 기자들과도 정보를 공유하며 성과를 자랑했다. 대통령 출마 선언 직전부터 퇴임하는 순간까지 그는 뉴스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며 미디어의 조명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책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를 쓴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018년 8월 14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전화통화를 같은해 9월 4일 공개했다./조선일보DB

특히 그의 집권 초기 행정 경험이 없는 신인들로 구성된 백악관 참모진은 정치 싸움과 내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의도적인 누출(leak) 기사들이 난무했다. 여기에다 리버럴 유권자들의 불만과 불안에 편승한 주류 미디어들의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반(反)트럼프 보도는 유례없는 디지털 구독자 증가 같은, 언론사 입장에서 ‘흥행 대박’을 낳았다.

◇미디어에 소극적인 바이든의 ‘역풍’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와 정반대로 재미없고 돌출성 발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 백악관 참모진도 공직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많고, 수년간 내부 팀워크를 다져 결속력이 단단하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취재대상인 백악관에서부터 내부 갈등과 음모 같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뉴스가 사라졌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기자들이 2019년 4월15일(현지시간) 본사 편집국에서 퓰리처상 수상을 자축하고 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산형성 과정을 파헤친 보도로 해설 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조선일보DB

피터 베이커(Peter Baker) NYT 백악관 담당 수석기자는 WP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시절에는 4년 내내 넘쳐나던 백악관 내부의 누출 기사가 바이든 정부 들어 끊어졌다. 백악관 내부 소식이나 정쟁(政爭) 관련 정보 자체가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매일 치고받는 ‘전쟁’을 벌였던 리버럴 성향의 주류 미디어들은 바이든 노선에 대체로 동조한다. 그래서 공세적인 비판 보도의 칼날이 스스로 무뎌졌다. 이로 인해 눈길을 끄는 콘텐츠가 크게 줄어 이용자들의 외면을 자초(自招)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SNS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후 4개월여동안 언론 노출을 꺼려온(low-visibility) 것도 주류 미디어에 대한 관심 저하(低下)를 부채질했다. 일례로 트럼프와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후 각각 28일과 21일만에 첫 공식 기자회견을 했지만, 바이든은 65일째인 올 3월25일 첫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보다 앞선 15명의 전임 대통령들이 모두 취임후 33일 내 첫 기자회견을 연 것과 비교하면 한달 넘게 늦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3월 25일(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취임 이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주류 미디어들의 부진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메레디스 레비언(Levien) NYT컴퍼니 CEO는 “올해 전체 디지털 유료 구독자 수는 작년 보다 못한 2019년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 매체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식 대응에 나서고 있다.

◇NYT는 디지털 초점...WP는 취재 역량 강화

WP는 취재 역량을 키워 탐사보도를 강화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카메론 바(Cameron Barr) 편집인 대행은 “우리는 전임 대통령들에 대한 취재 만큼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서도 최대한 공격적으로 취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WP는 1000여명인 편집국 인원을 올 연내 1150명 이상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한해에 150여명 기자 채용은 144년 WP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NYT는 쿠킹(Cooking)·게임·오디오 같은 디지털 상품 개발과 이용자 분석 등으로 수익성을 더 높인다는 전략이다. 이미 올 1분기 신규 디지털 유료 구독자(30만 1000명) 가운데 비뉴스 구독자(16만 7000명)는 45%에 달했다. 디지털 유료 구독자 증가세 둔화에도 불구하고 NYT의 1분기 영업이익(6810만달러)은 작년 1분기(4430만달러) 대비 54% 증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018년 8월 15일 홈페이지에 ‘자유 언론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A FREE PRESS NEEDS YOU)’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독자들에게 언론에 적대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연대할 것을 당부했다./조선일보DB

미디어 분석가들은 “주류 미디어들의 생존을 위해 정론(正論) 저널리즘 복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뉴스분석 뉴스레터를 1987년부터 내고있는 앤드류 틴달(Andrew Tyndall)은 “최근 수년간 전통 미디어들은 심층 보도와 타블로이드식 보도를 뒤섞어왔다”며 “이제 권위지와 타블로이드 매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완수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미국의 대표 미디어들 조차 과도할 정도로 당파적 색채와 자극적인 보도가 많아졌다”며 “이들은 먼저 정보와 뉴스에 대한 신뢰를 되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치 재개하면, 또 ‘트럼프 효과’?

일각에선 주류 매체들이 예상보다 빨리 부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낙선자’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전히 높은 정치적 지지를 받고 있어서다. 이달 중순 CBS방송이 공화당원 951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 기조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원은 89%, ‘이민 정책과 언론 대응을 따라야 한다’고 답한 당원은 각각 88%와 77%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0 대선의 합법적인 승자(勝者)라고 응답한 당원은 33%에 그쳤다.

미국 공화당 서열 3위로 대표적 '반(反)트럼프' 인사인 리즈 체니 하원 전국위원회 의장이 2021년 5월 12일(현지시간) 지도부에서 쫓겨난 뒤 워싱턴DC 연방 의사당에서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그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의 딸이다./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공화당 내부에서 한층 막강해지고 있다. 이달 12일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비공개 투표를 통해 당내 서열 3위인 전국위원회 의장(Chair of the House Republican Conference)을 맡고 있던 반(反)트럼프 성향의 리즈 체니(Liz Cheney) 의원을 쫓아내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장을 적극 대변해온 엘리스 스테파닉(Elise Stefanik) 의원을 뽑은 게 이를 보여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년 중간선거 등을 앞두고 정치 활동을 본격 재개하고 이에 맞서 반대편 진영이 뭉친다면, 또다시 ‘트럼프 효과’ 같은 반사 이익을 주류 미디어들이 일부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