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힘든 게 카드 수수료 때문이 아닌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정부의 수수료 인하 때문에 그간 공짜로 받던 혜택들만 사라지게 생겼습니다.”
서울 논현동에서 순대집을 운영하는 이성준씨는 이달부터 0.3%포인트 인하되는 카드 수수료율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카드사가 떼가는 수수료가 줄면 가게 순이익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인데 왜 달갑지 않은 것일까.
이씨는 “카드 수수료 때문에 마진이 줄게 된 밴 대리점(신용카드조회기 업체)들이 그간 공짜로 해줬던 단말기 AS를 유료로 전환하고, 영수증 종이도 서비스 없이 전부 돈을 받게 될 거란 얘기가 파다하다”며 “코로나 영업시간 제한으로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운영비만 늘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소상공인의 카드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취지로 이뤄지는 정부의 카드 수수료 인하 정책이 현장에서 잡음을 내고 있다. 카드 수수료 인하로 수익성이 악화된 밴 대리점들이 그간 영세 가맹점주에게 공짜로 제공하던 혜택들을 유료로 전환하면서다. 밴 대리점은 밴사(VAN)가 카드사에서 정률제로 받은 수수료의 일부를 받기 때문에 이번 수수료 인하로 타격이 크다. 카드 수수료가 인하된 만큼 밴 사, 밴 대리점에 떨어지는 수수료도 깎이는 것이다. 밴 대리점 업계는 올해 매출이 평균 15%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서울 사당역 인근에서 삼겹살 집을 운영하는 김규철씨는 “카드 수수료를 계속 내리니, 고사 직전이 된 밴 대리점들이 우리에게 주던 서비스를 줄이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먹고 살기 힘든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했다. 통상 새로운 가맹점이 오픈하면 밴 대리점에서 카드 단말기와 CCTV 설치를 무상으로 해주곤 했는데, 점차 이런 관행이 사라지고 있다. 업주 입장에서는 최소 300만~400만원의 초기 비용이 더 드는 셈이다.
◇연이은 카드수수료 인하가 빚어낸 ‘乙의 전쟁’
정부는 2012년부터 3년마다 카드 수수료를 개편하고 있다. 카드사의 적정비용을 주기적으로 재산정해 수수료율을 정하는데 그간 줄곧 큰 폭으로 인하돼 왔다. 지난달 31일부터는 연 매출 3억원 이하 영세가맹점 카드 수수료율이 0.8%에서 0.5%로 내려간다. 밴 사와 밴 대리점을 포함한 카드업계는 “이미 마진이 제로 수준이었는데 한계에 달했다”고 말한다.
현장에서도 이번 카드 수수료 인하가 영세 가맹점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있었다. 연 매출 5억이 안 되는 가맹점주는 전체 매출의 1.3%를 100만원 한도로 부가가치세에서 세액 공제받기 때문에 수수료로 낸 돈 이상의 금액을 돌려받고 있어서다.
◇고사 직전 밴 사·밴 대리점 “코로나 피해보상금도 못 받아” “카드사가 수수료 내리면 총파업”
밴 대리점은 가맹점 관리 및 매출전표 수거 업무를 담당한다. 이들의 ‘본사’격인 밴 사는 수거된 전표를 카드사에 넘겨 대금을 요청한다. 해당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카드사는 밴 사에 결제건당 정률제로 수수료를 제공하고, 밴 사는 받은 수수료의 일부를 밴 대리점에 지급하는 구조다.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카드수수료 인하의 영향은 카드사에서 시작해 밴 대리점으로까지 연쇄적으로 미칠 수 밖에 없다. 최근에는 수익성이 악화된 카드사들이 밴 사를 거치지 않고 전표를 직접 매입(EDC)하는 방식의 자구책을 찾는 추세여서 밴 업계의 고심이 깊다.
심지어 코로나19 영향으로 밴 사 매출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로 식당, 카페 등 가게가 영업시간 제한을 받게 돼 오프라인 결제 건수가 급감한 탓이다. 카드사는 온라인 결제에서도 일부 수익 보전을 할 수 있지만, 오프라인 결제 수수료가 거의 유일한 수입원인 밴 사와 밴 대리점은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태다. 한 두 명, 또는 가족경영을 하는 곳이 많을 정도로 영세 업체가 많지만 코로나 소상공인 지원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7년 1조1676억원이었던 밴 사 매출은 작년 3분기에는 7464억원으로 36%나 줄었다. 밴 사는 올해 매출은 10% 이상 더 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 밴 사 관계자는 “직원 30% 해고, 급여 삭감 등 쓸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한 상태”라며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고 말했다. 밴 대리점 업계는 올해 매출이 15% 이상 급감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성행하는 배달주문도 밴 업계를 괴롭게 하고 있다. ‘배달의 민족’과 같은 배달앱 주문·접수 프로그램이 포스 단말기 시스템과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AS 건수가 늘어나 밴 대리점 측에서는 상시 대기인력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배달앱 주문의 경우, 배달 기사용 주문서까지 추가로 출력해야 해 매장 주문 때보다 사용하는 종이 양이 많기도 하다. 한 밴 대리점 측 관계자는 “매출이 큰 우량 가맹점에는 종이를 공짜로 줄 수 밖에 없는데, 최근 그 양이 크게 늘어 출혈이 크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카드 결제 시스템의 말단에 있는 밴 대리점이 비용 절감 차 전산 관리 직원을 줄이고, AS 인력을 줄일 경우 전산 사고나 장애가 빈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산 인프라 업데이트 주기가 늦어지고, 관리 직원이 감축돼 서비스 복구 속도가 느려질 경우 국가 기간망이라 할 수 있는 카드 결제 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밴 업계 살릴 지원책도 필요
금융 당국은 카드사 적격 수수료 재산정을 위한 TF를 1분기 중으로 꾸릴 예정이지만, 현장에서 뛰는 밴 사와 밴 대리점은 회의체에 들어가지 못했다. 밴 대리점 협회 측은 향후 카드사로부터의 비용 전가가 현실화할 경우 총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회원사들을 상대로 파업 의사를 설문하고 있다. 밴 대리점이 총파업에 돌입하면, 가맹점주들은 매출전표를 직접 카드사에 제출해야 한다. 결제대금을 정산 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금의 최소 3~4배로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가맹점 오픈을 앞둔 점주들이나 가게를 인계 받아 재오픈하는 등 단말기 신규 설치·명의변경 업무도 차질을 빚게 된다. 밴 업계 관계자는 “아주 예전에는 밴 사가 고율의 수수료를 받았던 게 맞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결제 수단의 변화와 코로나 등으로 어려운 시기에 밴 사·밴 대리점도 상생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보호해주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