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과 13일 한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업체가 3차례에 걸쳐 9000개를 발행한 게임 관련 NFT(대체 불가능 토큰)는 매번 1초도 안 돼 ‘완판’ 됐다. 30대 직장인 전모씨는 이 NFT를 사려고 국내 최대 코인 거래소 업비트에 계좌를 만들었다. 가상 자산을 넣어두는 ‘개인 지갑’의 코인으로만 구매할 수 있었는데 평소 쓰던 거래소인 빗썸에서는 지난달 말부터 거래소에서 구입한 코인을 개인 지갑으로 전송하는 것이 전면 금지됐기 때문이다. 업비트에는 그런 규제가 없다. 전씨는 “NFT나 디파이(DeFi·탈중앙 금융)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개인 지갑을 활용하는 것이 필수인 상황에서 지나친 규제 아니냐”라고 말했다. 가상화폐 업계에 따르면, 가상화폐 거래가 허용된 국가 중에서 거래소에서 개인 지갑으로 출금하는 것을 규제하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코인 지갑’ 규제 거래소마다 제각각
개인 지갑을 활용한 가상 자산 투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 2, 3위 코인 거래소인 빗썸과 코인원은 계좌 제휴를 하고 있는 은행의 요구로 규제를 새로 만들었다. 빗썸은 지난달 27일부터 개인 지갑으로의 코인 출금을 아예 막았고, 코인원은 지난달 24일부터 개인 식별 정보(이름,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등)를 대조해 ‘내 지갑’으로 인증받아야만 출금이 가능한 ‘개인 지갑 실명제’를 도입했다. 두 거래소와 실명 계좌 발급 제휴를 맺은 NH농협은행은 “자금 세탁 방지 목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신한은행이 실명 계좌를 발급하고 있는 업계 4위 코빗도 조만간 비슷한 규제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뱅크와 제휴를 맺고 있는 업계 1위 업비트는 이런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업비트로 고객이 쏠리는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란 말이 나온다.
◇자금 세탁 방지 기준 은행마다 달라
개인 지갑으로의 출금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트래블 룰(Travel Rule·자금 이동 규칙)’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트래블 룰은 거래소 간 100만원 이상의 코인을 주고받을 때 송금인과 수취인의 정보(성명·국적·주소 등)까지 파악해 같이 보내도록 하는 코인 거래 ‘실명제’다. 다음 달 25일 도입된다. 거래소 간 자금 흐름은 투명해지지만, 거래소 밖 개인 지갑으로 빠져나가는 코인은 투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NH농협은행이 실명 확인을 강화한 것이다.
반면 케이뱅크는 굳이 이런 규제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거래소에서 해킹이나 자금 세탁 등 관련 사고가 터지면 실명 계좌를 발급해 준 은행에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똑같지만 은행별 리스크 평가 정도에 따라 거래소에 요구하는 수준도 달라지는 것이다.
농협은행이 자금 세탁 방지 문제에 예민한 이유는 과거의 ‘상처’ 때문이다. 농협은행 뉴욕 지점은 2017년 12월 자금 세탁 방지 업무 미흡으로 119억원가량 과태료를 부과받은 적이 있다. 가상 자산 거래소가 국제 자금 세탁에 연루될 경우 해외 지점이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보니 거래소 위험 관리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농협은행의 해외 지점 및 사무소는 7곳에 이른다. 코빗과 계좌 제휴한 신한은행의 해외 현지 법인은 10곳이다.
반면 케이뱅크는 해외 영업점이 없다 보니 전통 은행에 비해서는 제재에 대한 부담이 비교적 덜하다. 한 은행 관계자는 “업비트 덕에 지난해 신규 계좌가 급증한 만큼 업비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 코인 시장 ‘갈라파고스섬’ 될 수도
개인 지갑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인터넷 코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어지고 있다. 특히 월간 이용자가 2100만명에 달하는 개인 지갑 ‘메타마스크’는 개인 정보를 넣지 않는 방식이라서 실명제 자체가 불가능해 문제가 되고 있다. 결국 업비트 등 규제가 없는 거래소로 코인을 옮겨서 출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통일된 기준을 만들지 않아서 은행마다, 거래소마다 제각각인 규제가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형중 한국핀테크학회 회장은 “한국 코인 시장이 세계적 흐름에 동떨어진 규제로 뒤처질 수도 있다”고 했다.
☞개인지갑
가상화폐거래소에서 구입한 코인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전자지갑. 거래소에 보관하는 것보다 해킹 위험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