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병원 3곳의 레지던트와 인턴 의사 1300여 명은 지난달 말 파업 찬반 투표에서 99%의 압도적 찬성률로 파업을 결의했다. 이들의 연봉은 5만~6만5000달러 수준으로 적은 편은 아니지만, “높은 인플레이션과 폭발하는 집값 대비 임금이 터무니없이 낮다”며 실력 행사를 예고한 것이다. 결국 LA 카운티가 임금 인상을 약속하자, 의사들은 지난 8일(현지 시각) 파업 결의를 취소했다.
지난 7일 미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의 한 주유소에서 만난 데이비드(50)씨는 주유기를 초록색 픽업트럭에 꽂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몇 달 전만 해도 60~70달러어치만 넣어도 탱크가 가득 찼지만, 이젠 같은 양에 90달러가 든다”고 했다. 캘리포니아 차량용 기름값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닥치면서 세계 최강 경제 대국인 미국이 흔들리고 있다. 서민 경제와 직결되는 기름값과 식료품값이 연일 상승하고, 기존 임금으론 인플레이션을 감당할 수 없다며 파업을 결의하는 곳이 늘고 있다.
◇식료품·기름·집값 등 안 오른 게 없다
미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거주하는 에일린씨는 식료품을 살 때마다 폭등한 물가를 체감한다고 했다. 예전엔 식료품 매장에서 일주일 치 고기와 우유, 계란, 샐러드, 과일 등을 사고 150달러 정도를 냈다면 이제는 같은 양을 사도 200달러가 넘는다는 것이다. 그는 “몇 개 집지도 않았는데 100달러는 훌쩍 넘는다”며 “단기간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 힘들다”고 했다.
지난 5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8.6% 폭등했다. 40년 만의 최고치였던 3월 상승률(8.5%)을 뛰어넘었다.
기름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미 실리콘밸리에서는 이제 갤런당 6달러 아래 주유소를 찾아볼 수 없다. 작년 3월 이 지역 기름값은 갤런당 3~4달러였다. 실리콘밸리뿐만 아니다. 8일 기준 미국 평균 휘발유값은 갤런당 4.955달러로, 한 달 전보다 14.8%, 1년 전보다 61.9% 폭등했다. 10일에는 미국 휘발유값이 사상 처음으로 갤런당 5달러 선을 넘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미국 주택 가격 상승도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올 3월 미국 주택가격지수 상승률은 20.6%로 통계가 집계된 1987년 이후 최대치다.
인플레이션은 저소득층에게 더욱 혹독하다. 캘리포니아 스톡턴의 무료 급식소인 ‘이멀전시 푸드 뱅크’에는 매일 오전 식료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 3시간씩 줄을 선다. 이멀전시 푸드 뱅크 관계자는 “코로나 전엔 연간 40만명이 이용했는데, 지금은 크게 늘어 연간 100만명 수준에 달한다”고 했다.
◇인플레 탓에 임금 올려 달라 여기저기 파업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실질 임금이 줄어든 근로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5월 캘리포니아 샌타마리아 지역의 블루베리 업체인 ‘J&G 베리 팜’에서는 농장 근로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딸기 1박스를 수확할 때 박스당 2.1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물가 상승으로 생계가 어렵다며 박스당 3.50달러로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애플·아마존 등 빅테크에서도 인플레이션에 못 버티겠다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노조를 조직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달 애플은 오프라인 매장인 애플스토어 직원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기존보다 10% 높은 22달러로 올리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기간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높였던 임금이 물가 상승을 자극하고, 이것이 다시 임금 인상 압력으로 이어지는 ‘임금·물가의 악순환(Wage-Price Spiral)’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최근 유가와 곡물 가격 급등을 이끌었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임금 상승 같은 변수가 남아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