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파리 남부 도시 라이레로즈의 한 대형 마트. 유통기한이 임박한 신선 제품을 30~50% 싸게 파는 ‘안티가스피(anti-gaspi·낭비 방지)’ 코너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다. 이날 나온 ‘땡처리’ 식품은 50여 개. 하지만 10분 만에 모두 동이 났다. 500g짜리 소고기 치마살 한 덩어리를 8유로(약 1만800원)에 집어든 콜레트씨는 “물가가 너무 올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 식구 밥 차려 먹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매장 직원 사이한씨는 “연초만 해도 그냥 버렸던 땡처리 식품들이 이젠 내놓자마자 팔리고 있다”고 했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와 식품 가격 앙등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는 지역이다. 휘발유 가격은 1L당 약 2.3유로(약 3100원) 내외로 올 들어 45%가량 상승했다. 심지어 생수 값까지 브랜드에 따라 10~45% 올랐다. 유럽 내 최대 경제인 독일과 프랑스의 지난 5월 물가 상승률(전년 대비)은 각각 7.9%와 5.2%에 달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 하락은 유럽의 정치 지형도 바꾸고 있다. 지난 4월 프랑스 대선에선 극우 성향 마린 르펜 후보가 “휘발유와 경유에 붙는 부가가치세를 폐지하고, 청년 소득세도 대폭 깎겠다”는 공약을 내걸자, 좌파 성향의 근로자들마저 대거 르펜을 지지하면서 10%대 초반이었던 지지율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 근접한 20%대까지 뛰어올랐다.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유통 업계는 ‘양극화’하고 있다. 파리 서남부의 한 쇼핑몰에선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계 대형 마트 오샹과 독일계 저가 유통업체 악시온 간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오샹이 매장 규모나 상품 수, 브랜드 파워에서 모두 월등하지만, 물가 급등에 주머니 사정이 빡빡해진 사람들이 값싼 식품과 생활용품을 주로 취급하는 악시온 쪽으로 점점 더 몰리고 있다. 쇼핑객 비르지니(32)씨는 “품질은 오샹 쪽이 훨씬 낫지만, 비슷한 품목을 놓고 보면 악시온 쪽이 평균 30% 이상 싸다”며 “요즘처럼 생활비 압박이 심할 때는 싼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 전문 매체 BFM 비즈니스는 “프랑스 카르푸와 독일 레베 등 대표 유통 업체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는 것과 달리 저가 유통업체인 리들과 알디는 스페인, 영국 등에서 수억 유로를 투자, 공격적인 출점(出店)에 나섰다”며 “저가 유통업체들의 약진은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 침체)의 징조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