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韓中)이 수교한 1992년부터 올 7월까지 우리나라의 대중(對中) 무역 누적 흑자는 7099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대미(對美) 무역 흑자 누적액(3066억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같은 기간 한국의 GDP는 5.1배, 중국은 35.5배 각각 불어났다.

연구개발(R&D)에 국가 총력을 쏟은 중국은 2020년 글로벌 R&D 1000대 기업 수에서 194개 자국 기업을 확보해 27개에 그친 한국을 앞섰다. 그 결과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흑자는 2013년의 40%에도 못 미쳤다. 올 5월부터는 대중 무역에서 사상 처음 4개월 연속 적자를 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최고의 경제 파트너였던 양국의 상생(相生) 모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중 경제 관계 구조 변화를 3가지 물음표로 정리해 본다.

◇①中은 아직도 ‘황금의 땅’?...‘복덩이’에서 ‘경쟁자’된 중국

중국은 한국 입장에서 최근접 거리에 14억 인구의 세계 최대 시장이면서 저임금 생산 기지라는 ‘3중(重) 매력’을 지닌 복덩이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對)중국 투자는 봇물을 이뤄 지난해까지 누적 1000억달러(약134조원·중국 상무부 실제 집행금액 집계 기준)를 넘었다.

홍대순 글로벌정책전략연구원장은 “한국이 30년 흑자를 누리는 동안, 중국은 집요한 기술 및 인재 빼가기로 자국 기업의 덩치를 급속도로 키워 우리의 턱밑을 겨누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세계 1위로 등극한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우, 2003년 한국의 하이디스(옛 현대전자 LCD사업부)를 중국 기업 BOE가 인수한 게 결정적인 도약대가 됐다. 중국은 한국 주요 기업 공장을 유치한 뒤 자국 기업에만 보조금을 주는 방식 등으로 기술은 빼가고 성장은 방해했다. 중국은 나아가 “10년간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리커창 총리)으로 기술 고도화에 진력(盡力)해 상당수 품목에서 한국을 능가하는 경쟁력을 확보했다.

중국 푸젠성 닝더시에 있는 배터리 기업 CATL 본사 건물. 공격적인 연구개발과 중국공산당의 비호에 힘 입어 CATL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을 발판으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세계 1위에 올랐다./조선일보DB

올해 상반기 대중 교역 품목(5448개) 가운데 한국이 70%(3835개)에서 적자를 낸 게 이를 보여준다. 중국 수입 의존도가 80%를 넘는 품목만 1850여개이고, 우리나라는 반도체·철강·자동차 등 5대 핵심 제조업의 산업 소재 90% 이상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요소수 대란’처럼 중국이 수출을 막거나 줄이면, 한국이 휘청거리는 구조가 됐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중국은 기업 활동의 자율성은커녕 기업인의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 지뢰밭 같은 곳”이라며 “특히 핵심 소재의 중국 과잉 의존도를 하루빨리 낮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②'安美經中' 지금도 가능?...美·EU 수출, 4년 연속 중국 능가

올 6월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20년에 걸친 대중 수출 호황이 끝나간다”며 ‘경제 다변화’ 의지(意志)를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안보는 미국과 협력해도, 경제는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안미경중’을 고수한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한국의 ‘안미경중’은 미국이 중국을 포용할 때 가능했고 미·중(美中) 대결 시대에는 효력을 다했다”며 “중국의 위협 못지않게 미국이 작심하고 보복할 경우 후환을 신경써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중국 견제·봉쇄가 5G통신과 반도체를 넘어 전기차·재생에너지·인공지능(AI) 같은 첨단 미래 기술 분야로 확장하는 점도 주목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1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척 슈머(Chuck Schumer)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배석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of 2022)' 서명을 마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미·중 전략 경쟁 시대에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AP연합뉴스

박상욱 서울대 교수는 “과학기술 차원에서 ‘안미경중’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라며 “단적으로 2020년 미국으로부터 기술 도입액이 59억달러인데, 중국에서 기술 도입은 6억4000만달러에 불과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원천기술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미국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의 대(對)미국 및 유럽연합(EU) 수출액 합계는 2019년부터 4년 연속 대중 수출액을 웃돌고 있다. 이는 ‘중국 경제의 포획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근거로 꼽힌다. AI, 양자(量子)컴퓨터처럼 중국이 앞선 분야에서 중국은 한국을 아예 협력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장관은 “공산당 독재인 중국과 완전한 자유를 향유하는 한국은 국가 정체성과 가치 측면에서 완전 반대되는 나라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주권이나 안보를 양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③中 압박하면 韓 속수무책?...中 경제에도 ‘급소’ 있어

2016년 발발한 중국의 사드(THAD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과 한한령(韓限令·한류 금지령)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중국이 제2, 제3의 사드 보복을 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중국 굴기(崛起)’를 국정목표로 내건 시진핑 총서기가 3연임에 성공할 경우, 한국에 수직적 상하 관계 요구를 노골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경제를 무기(武器)화해 각국을 압박하는 중국의 보복이 오히려 자국 핵심 산업을 해치는 비수(匕首)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환우 KOTRA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대중 수출 품목에서 반(半)제품 비중이 낮아지고 반도체·자동차 등 고급 부품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며 “중국 경제에도 ‘아킬레스 건(腱)’처럼 약한 급소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 있는 YMTC 낸드플래시 공장 전경.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의 총력 지원을 받고 있는 YMTC는 낸드플래시 분야 점유율 세계 6위 기업이다. 이 분야 세계 1,2위인 한국 기업들(삼성전자, SK하이닉스)과 1~2년의 기술 격차를 보이고 있다. 낸드플래시는 D램과 더불어 반도체 메모리 분야의 양대(兩大) 축(軸) 중 하나다./YMTC 제공

지해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만약 중국이 경제 보복을 개시해 보복 강도를 높일 때마다, 한국이 반도체 수출 물량을 1%씩만 줄여나가면 중국은 큰 타격을 입는다”고 했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D램 시장에서 삼성·SK·미국 마이크론 3개사의 점유율은 95%가 넘는다. 한국 기업들이 공급을 줄이면, 중국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중국의 공세에 한국이 더이상 속수무책(束手無策) 신세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빅터 차 미국 CSIS 부소장은 “한국이 미국, 일본 등과 연대해 공동 파트너십을 가동하면 중국의 경제 압박을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이 한·미·일 3국에 70% 넘게 수입을 의존하는 핵심 품목이 233개인 만큼, 이들과의 공동 대응은 강력한 억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격차 기술과 중국 전문가 양성에 목숨 걸어야”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

“30년 전 중국의 제조업 수준과 기술력은 한국의 무릎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목까지 찼다. ‘잔치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가 진짜게임이라는 각오로 심기일전해야 한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조선일보DB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중국은 세계 1위 인구 대국(大國)이자, 토지 대국, 시장 대국”이라며 “중국이 한 번 기술 제패(制霸)에 성공하면 자체 내수만으로 독식(獨食)할 수 있는 만큼, 한국은 초격차 기술 개발과 유출 방지에 목숨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산업은행 홍콩·상하이·베이징 지사에 근무했고 중국삼성경제연구원(SERI China) 원장을 지낸 중국 전문가이다. 박 교수는 “지금 전 세계에서 한국 제조업과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며 “중국을 압도하는 기술 우위가 없다면, 중국에 팽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앞으로 승부처는 한·중 두 나라 가운데 어느 쪽의 기술 개발 속도가 더 빠른가, 그리고 한국의 기술 우위와 고급 인력을 여하히 잘 지키느냐에 있다.”

중국 최대 IT 기업 중 하나인 화웨이는 미국의 전방위 견제에도 불구하고 총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를 계속 늘리고 있다./화웨이 연례 보고 간담회 캡쳐

그는 “한국의 소비재 수출은 현재 대중 교역액의 5%에 불과하다. 중국 시장이 아무리 넓어도 우리 제품을 못 팔면 우리 시장이 아니다”며 “한국 경제가 살려면 중국 내수 시장 공략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려면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중국 전문(專門) 인력을 기업마다 꾸준히 양성해야 한다. 장기 전략(長期 戰略)을 갖고 체계적 마케팅을 펼치지 않는다면, 갖고 있던 시장 마저 점점 잃게 될 것이다.”

박 교수는 “우리가 중국 보다 앞선 분야는 반도체와 OLED, 첨단 친환경 선박 뿐”이라며 “중국에 대한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고 냉정하게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LG전자는 IFA 2022에서 처음으로 세계 최대 올레드 TV인 97형 올레드 에보 갤러리 에디션(OLED evo Gallery Edition)을 공개한다. 모델들이 97형 올레드 에보(모델명: 97G2)로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연합뉴스
삼성디스플레이의 최첨단 QD-OLED/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