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허모(32)씨는 현금과 카드 등이 들어 있는 지갑 대신 얇은 명함 케이스만 들고 다닌다. 그는 “현금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됐고, 올 들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신분증도 최근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면서 모바일로 발급받아 지갑에 넣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지갑을 들고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고 했다.

식당 등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간편 결제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갑에 신용카드만 들고 다닌다고 했던 ‘현금 없는 사회’를 넘어서 아예 ‘지갑 없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편의점 등에서 물건 값을 지불할 때 신용카드 대신 스마트폰을 건네거나,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내미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지갑 대신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27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찾은 한 고객은 스마트폰을 꺼내 모바일 앱을 열고 해당 매장을 검색해 아메리카노를 골라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고 지문으로 본인 확인을 했다. 결제액의 1%는 포인트로 자동 적립됐다. 점원에게 주문 내용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게를 방문했지만, 주문부터 결제, 적립까지 모두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온·오프라인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 역시 지갑 없는 사회의 한 모습이다.

네이버페이·카카오페이 등 간편 결제 업체들이 스마트워치에서 쓸 수 있는 앱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조차 꺼낼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워치에서 앱을 켠 뒤 화면에 뜬 QR코드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네이버 관계자는 “워치 결제를 쓰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가 20대”라며 “삼성페이 앱이 깔려 있지 않아 불편을 겪었던 아이폰 사용자들도 애플워치로 간편 결제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크카드 256만장 사라져

간편 결제가 확산되면서 신용카드를 대체하는 현상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국내 오프라인 간편 결제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삼성페이의 오프라인 누적 결제액(추정치)은 2015년 8월 출시된 지 6년여 만에 136조원을 넘겼다. 출시부터 코로나 이전인 2019년 4월까지 3년 8개월간 누적 결제액은 30조원이었는데, 이후 3년 5개월 만에 100조원 넘게 증가했다.

간편 결제 업체별로는 지난 2분기 기준으로 1년 전에 비해 삼성페이가 50%, 카카오페이가 35%, 네이버페이가 100% 늘었다.

반면, 7개 전업 카드사(신한·KB국민·삼성·현대·하나·우리·롯데)의 체크카드 발급량은 지난 2분기 6146만8000장으로 1년 전보다 256만4000장 줄었다. 체크카드 없이 계좌를 연동하기만 해도 간편 결제 앱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급감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체크카드의 주력 고객인 MZ세대가 간편 결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각종 할인 혜택이 있는 신용카드와 달리 체크카드는 혜택이 거의 없다. 그나마 신용카드(15%)에 비해 소득공제율이 30%로 높지만 간편 결제를 쓸 때도 현금영수증 발급을 신청하면 30% 소득공제율을 적용받아 소비자 입장에서는 체크카드를 만들 이유가 점점 없어진다.

스마트기기를 이용한 지갑 없는 사회로의 전환은 전 세계적이다. 1993년 도입돼 미국 뉴욕 명물로 자리 잡은 메트로카드의 퇴장이 대표적이다. 지하철을 탈 때 찍는 노란 플라스틱 카드인데, 2021년 뉴욕시에서 모든 역사(驛舍)에 비접촉 결제를 도입하면서 2024년 메트로카드를 없애기로 했다.

‘현금 중심 사회’로 알려진 일본조차도 달라지고 있다. 이르면 내년 봄부터 모바일 앱 간편 결제 서비스로 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