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30년 연속 세계 1위를 지켜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초(超)격차’란 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다. 첨단 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기술적 한계 때문에 초격차 행보가 더뎌졌고, 그사이 후발주자들이 바짝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삼성도 작년 5월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메모리 산업에서 경쟁 업체의 도전이 거세져 ‘세계 최초=삼성’이란 상식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며 “거대 내수 시장과 국가적 지원을 받고있는 중국 메모리 업체의 성장도 위협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각각 30년, 20년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독보적인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다. 하지만 최근엔 ‘세계 최초’ 타이틀을 미국·중국 등 경쟁사에 내주고 있다.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은 작년 7월 ‘232단 낸드플래시’ 세계 최초 양산을 알렸다. 당시 삼성은 176단 낸드를 만들 때였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PC 같은 전자기기와 서버(대형 컴퓨터)에 탑재되는 데이터 저장용 반도체다. 고용량 구현을 위해 고층 아파트처럼 높게 쌓는 것이 기술력의 한 척도로 평가받는다. 그러자 캐나다의 한 반도체 컨설팅 업체는 “사실 중국 반도체 업체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가 마이크론보다 먼저 232단 낸드를 생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세계 최고층인 238단 낸드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은 작년 11월에야 236단 낸드 양산을 발표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은 “시장 구도를 흔들기 위해 업체들이 일종의 ‘기술 마케팅’을 하는 측면이 있다”며 “시장의 수요, 단위 면적당 생산성 등 여러 고려 요소가 있는 만큼 무조건 세계 최초가 좋다고 보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D램,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10%포인트 이상 격차로 선두를 지키고 있다. D램 시장은 삼성전자(40.6%), SK하이닉스(29.9%), 마이크론(24.8%)의 ‘빅3′ 구도(작년 3분기 기준)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전자(31.6%), 일본 키옥시아(21.1%), SK하이닉스(19%), 미국 웨스턴디지털(12.4%), 마이크론(11.8%)이 경쟁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쟁사들의 기술 추격이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반응이 꾸준히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히 중국 YMTC의 232단 낸드가 예상 외로 품질 수준이 높아 삼성 내부에서도 상당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계 최초 3나노 양산’ 타이틀을 따내며, 대만 TSMC를 추격하는 것처럼 메모리 시장에서도 미국·중국의 경쟁 업체들이 세계 최초 타이틀을 앞세워 삼성을 추격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에서는 후발 주자에게 쫓기고 파운드리에서는 TSMC가 더 앞서가는 형국”이라며 “삼성 반도체가 고비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수율
반도체 산업에서 생산품 대비 정상품이 최종 생산되는 비율. 수율이 높을수록 불량품이 적다는 의미다. 반도체 기업의 생산성·수익성·기술력을 가늠하는 지표다.
☞반도체 IP
반도체 설계에 쓸 수 있도록 미리 확보한 설계 자산(지식재산권). 기업들이 반도체를 설계할 때 규격화된 블록을 기반으로 첨단 기술을 더하는데, 규격화된 블록이 IP다. 고객 입장에선 IP를 많이 확보한 기업에 생산을 맡겨야 설계가 편리하기 때문에, IP는 파운드리 기업의 경쟁력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