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와 파운드리는 다른데, 업(業)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경계현 삼성전자 사장)

30년째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는 뒤늦게 ‘을(乙) 비즈니스’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에 뛰어들었다가, 신뢰 문제로 많은 내홍을 겪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해 기자 간담회에서 “메모리는 ‘쇼티지(shortage·공급 부족)’가 발생해도 고객은 우리를 원망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도 제품을 살 수 있지만, 파운드리는 우리가 (약속한 반도체를) 제공하지 못하면 고객사가 망할 수 있다”며 “(이런 문제로) 실리콘밸리에서 삼성 파운드리의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삼성 파운드리는 추후 취소를 감안해 생산능력보다 20% 더 많은 주문을 받았다가 코로나 와중에 벌어진 반도체 대란(大亂)에 납기를 맞추지 못해 한동안 고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반도체는 만든 만큼 팔면 되지만, 파운드리는 10달러짜리 반도체라도 주문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고객사가 제품을 출시하지 못해 파산할 수 있다는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생소한 乙 비즈니스’에 고전하는 삼성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는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라는 도전적 목표를 내놨지만,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대만 TSMC와 달리 시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30년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와, 36년간 고객사 요구를 맞추는 파운드리에만 몰두해온 대만 TSMC가 걸어온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생산 시설(capacity) 투자 타이밍이다. 삼성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마치 메모리처럼, 파운드리 고객이 나타날 때까지 투자를 하지 않고 기다리는 전략을 썼지만 TSMC는 일단 투자를 해서 생산능력을 확대해 놓은 뒤 손님을 모은다”며 “파운드리는 호텔업과 비슷해 호텔을 짓고 손님을 맞아야지, 손님이 온다고 그때그때 호텔을 새로 지어서는 이미 늦는다”고 했다.

또 5년 정도마다 라인을 최신으로 바꿔야 하는 메모리와 달리, 파운드리는 감가상각이 끝난 구형 라인에서도 10년가량 더 수익이 발생하는 독특한 비즈니스인데 삼성은 메모리처럼 계속 최첨단 공정에 몰두하면서 수익성과 포트폴리오 면에서 손해를 봤다는 평가도 나온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대규모 시설 투자가 핵심인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선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경쟁력을 보였지만, 팹리스(반도체 설계)부터 후공정(반도체 포장·검사)까지 반도체 생태계가 단단히 받쳐줘야 하는 파운드리 사업에선 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팹리스 저변 취약한 것도 단점”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저변이 취약한 것도 삼성 파운드리 사업에는 결정적인 취약점이다. 시장조사 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세계 팹리스 점유율은 단 1%에 불과하다. 애플, 테슬라 등 빅테크 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업이 많은 미국이 68%로 단연 1위다. 이어 반도체 생태계가 풍부한 대만(21%), 중국(9%) 순이다. 고객사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는 고객사인 팹리스와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고객층이 얇은 것이다.

실제로 TSMC는 애플, AMD, 미디어텍 등 쟁쟁한 빅테크 기업부터 작은 스타트업까지 500여 다양한 기업을 고객사로 보유하고 있다. 반면 삼성 파운드리의 최대 고객은 ‘삼성전자’다. 삼성은 고객 명단을 공개하지 않지만, 증권가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전체 매출의 43%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퀄컴, 엔비디아 등 3사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도 팹리스를 비롯한 생태계 확장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17년 파운드리 사업부를 출범시킨 이후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포럼을 만들고, 중소 고객사에 최첨단 5나노 공정까지 제공하는 등 지원을 늘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리·팹리스

파운드리(foundry)는 고객사에서 설계도를 받아 위탁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생산 설비 없이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가 파운드리의 고객이다. 독자적으로 칩을 설계하는 애플·구글 같은 빅테크들도 일종의 팹리스다. 삼성전자는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종합 반도체 회사지만 파운드리 사업부도 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