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이른바 ‘레거시(legacy·구형) 반도체’를 주력 제품으로 생산하는 자국 기업들을 본격 육성하기로 했다. 지난 2~3년간 이어진 미국의 초고강도 반도체 제재로 첨단 반도체 경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서 구형 반도체는 2011년 양산되기 시작한 28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와 그 이전의 공정에서 만들어진 반도체를 뜻한다. 반도체 제품은 공정이 미세할수록 첨단이고, 가격도 비싸진다. 반도체 업계에선 “중국이 ‘첨단 기술 따라잡기’에서 구형칩 ‘박리다매’로 정책을 변경하며 생존에 발버둥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21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은 일부 선별 기업을 대상으로 ‘상한(cap)’이 없는 반도체 보조금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표 수혜 기업은 중국 1·2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SMIC와 화훙반도체, 중국 최고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인 하이실리콘의 모회사 화웨이, 반도체 장비 업체 베이팡화촹과 중웨이 등이 꼽힌다. 모두 미국의 제재에 막혀 28나노와 그 이전 구형칩에 주력하는 기업들이다. FT는 “선별된 기업들은 별다른 지표를 달성할 필요도 없이 지원만 하면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현실 자각, ”구형칩이라도 살리자”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오랜 기간 꿈꿔온 ‘첨단 반도체 굴기’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 YMTC는 최첨단 낸드플래시를 개발하고도 생산 장비가 없어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고, 화웨이의 최첨단 모바일 반도체를 디자인하던 하이실리콘은 올 들어 시장점유율이 0%대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벼랑 끝에 몰린 중국이 ‘28나노’ 반도체를 미국과의 경쟁에서 지켜줄 필수 무기로 보고 있다고 분석한다. 28나노 반도체는 주로 전력공급장치에 활용되며 차량을 제어하는 부품과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에 쓰인다. 시장조사 업체 IBS에 따르면 차량용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2030년 28나노대 반도체 제품 시장 규모가 281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2020년의 2배 수준이다. 특히 이 시장에서 중국의 시장점유율은 2025년 40%대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기업들은 28나노대 반도체 생산량 확대에 매진하고 있다. SMIC는 2020년부터 베이징·선전·상하이·톈진 4곳에 28나노 및 그 이전 공정의 제품을 생산하는 신규 생산 라인 구축에 돌입했다. 이 회사는 한때 첨단 공정인 7나노 기술 돌파에 성공했고, 양산을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로 네덜란드 ASML의 첨단 장비 반입이 막히며 구형칩 생산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여기에 중국은 베이팡화촹·중웨이 등 장비 기업을 키워 ASML, 일본 니콘 등 외국 기업 의존도가 높은 28나노 생산 장비의 ‘100% 국산화’를 꾀하고 있다.

◇제재 수위 높여 中 숨통 끊으려는 미국

관건은 미국의 대응이다. 미국이 제재 범위를 구형칩까지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가정보국(DNI)은 지난 2월 발간한 ‘연간 위협 평가’에서 “2024년부터 양산에 돌입하는 중국의 구형칩 생산 라인들이 중국을 이 분야의 강자로 만들 것”이라며 “다수의 구매자가 중국 제품에 의존하게 될 위협이 있다”고 했다.

최근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압박아래 ASML의 대중 수출 통제에 나서며 구형칩 제조에 필요한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수출 제한 품목에 포함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자국 램리서치·KLA 등 장비 업체에 40나노 이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 수출은 사전에 허가를 받도록 할 계획이다. 중국이 장비 자립을 이루기 전에 필수 장비 공급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만 디지타임스는 “(제재가 확대되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낙후된 40나노와 그 이전의 구형칩에 멈출 수 있다”며 “이를 피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기술 자립 총력전을 벌일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