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지난 24일 오전(현지 시각) 독일 증시에서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 주가가 개장과 함께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장중 한때 14.9%까지 빠졌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 이후 최대 폭락이었다. 도이체방크의 부도 가능성을 뜻하는 신용디폴트스와프(CDS)는 8.3% 넘게 치솟았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크레디스위스 다음 타깃은 도이체방크가 아니냐는 위기감도 고조됐다. 다만 “특별한 촉매제가 없는 ‘과한 흔들기’”란 인식이 퍼지며 하락 폭을 일부 만회하고 8.5% 떨어진 채 마감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과거 금융 위기 때는 은행들이 투자한 자산이나 대출에서 대규모 부실이 발생한 충격으로 파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에서 시작된 이번 은행 위기는 과거와는 현저히 다른 양상이다. SVB가 투자했던 대부분 자산은 안전자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미 국채였고, 도이체방크는 은행 건전성을 위협할 만한 큰 부실이 없었는데도 주가가 급등락했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처럼 공포가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번진다는 뜻에서 ‘뱅크데믹(Bankdemic·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뱅크데믹이라는 은행을 뒤덮은 침울한 구름이 자본 시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전했다.
◇디지털화로 빨라진 공포 감염력
뱅크데믹으로 휘청거린 도이체방크는 이번 위기에서 파산·합병된 은행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총자산만 1870조4000억원(약 1조3370억유로)으로 실리콘밸리은행(271조7000억원)의 7배, 크레디스위스(750조7000억원)의 2.5배에 달한다. 금융안정위원회(FSB)가 매긴 등급도 도이체방크가 크레디스위스보다 한 등급 더 높다.
물론 도이체방크에 위기의 소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레디스위스 사태 때 휴지 조각 신세가 된 AT1 채권(신종자본증권)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면서 도이체방크가 2014년 발행한 AT1 채권 값이 이달 들어 29.8% 떨어졌다. 도이체방크가 침체 상태인 미국 상업용 부동산에 대출이나 투자를 꽤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앤드루 쿰스 시티그룹 애널리스트는 도이체방크 주가 폭락에 대해 “비이성적 시장 외엔 급락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저 은행도 혹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막연한 공포가 탄탄한 도이체방크를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문제는 공포의 감염이 디지털화를 타고 더 빨리, 더 지독하게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IT 기업들이 모바일뱅킹으로 초고속 뱅크런을 일으켜 SVB가 무너진 것처럼, 뱅크데믹도 삽시간에 번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중심에는 소셜미디어가 있다. WSJ는 “최근 (미국 개인투자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Reddit)에서 도이체방크에 대한 언급이 급증했다”고 전했다.
◇국내 은행은 감염 안 되나
뱅크데믹이 국내 금융회사까지 감염시킬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다는 게 금융 당국과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다. 하지만 피해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다. 4대 금융지주를 포함한 9개 은행주로 구성된 ‘KRX(한국거래소) 은행’ 지수는 이달 들어 9.5% 하락했다. KRX의 모든 업종 가운데 증권업과 함께 가장 하락 폭이 컸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 주식을 이달 들어 5540억원어치 순매도했다. 금융 당국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를 꼼꼼히 모니터링하겠다”고 하는 이유다.
스위스의 UBS와 크레디스위스 합병 과정에서 문제가 된 AT1 채권의 국내 발행 규모는 지난 20일 기준 31조5000억원이라고 금융감독원은 밝혔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국내 은행들의 신종자본증권은 금융 당국으로부터 ‘부실 금융 기관’으로 지정될 때만 상각된다”며 “국내 은행들은 미국이나 유럽이 요구하는 수준보다 훨씬 많은 자본을 확충하고 있는 데다 대출 부실도 거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