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기초체력 바로미터인 원화 가치가 최근 크게 하락하고 있다. 특히 올 들어선 미국 달러가 약세인데도 유독 원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고 있다. 보통은 미국 달러가 약세면 원화는 강세를 보이기 마련인데, 달러와 원화가 같이 하락하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극심한 수출 부진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 등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허약해지면서 달러 약세에도 원화가 힘을 쓰지 못하고 글로벌 ‘동네북’ 통화로 전락해버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독 원화만... 달러와 동반 약세
1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15.3원 내린 달러당 1310.4원에 마감했다. 원화 환율은 이달 들어 전날까지 2% 가까이 상승(원화 가치 하락)했는데, 이날은 숨 고르기를 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1300원대 높은 구간에서 움직이는 원화 약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실은 원화 환율은 작년이 더 높았다. ‘킹달러’ 여파로 작년 10월 달러당 1500원을 육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고환율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주요국 통화 중에서 유독 원화만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미국의 침체 걱정이 커지고 미 연준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추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자 유로, 중국 위안화 등 다른 통화는 강세로 돌아섰다. 반면 원화만 큰 부진에 빠져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올해 1.8% 하락(지난 11일 기준)했다. 같은 기간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4.9%나 하락했다. 영국 파운드화(+2.6%)와 유로화(+1.9%), 중국 위안화(+0.4%) 등의 가치는 일제히 상승한 것과 상반된 흐름이다. 엔화 가치도 소폭 하락(-1.9%)했으나 원화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경제제재를 받는 러시아 루블화(-17.3%) 정도만 원화보다 약세인 통화로 꼽힌다.
원화와 위안화의 디커플링(탈동조화)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한국의 대(對)중국 의존도가 높고, 같은 아시아 신흥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통상 원화와 위안화는 비슷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올해 둘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연구위원은 “미·중 경쟁 등으로 한국의 대중국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위안화와 원화의 동조 현상은 앞으로도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출 부진, 금리 차에 신음하는 원화
원화 ‘나 홀로 약세’의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한국의 수출 부진과 한·미 금리 차 확대 가능성이다.
제조업 기반의 수출 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는 무역 흑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해외에서 달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수출 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반도체 업황 악화와 대중국 수출 감소가 겹치면서 13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26년여 만에 가장 긴 무역수지 적자다. 우리나라가 수출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원화는 달러 약세와 무관하게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한미 금리 격차가 커지는 것도 원화 약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작년 4월부터 일곱 차례 연속 금리를 올리다 올 2월과 4월 연속으로 금리를 동결(연 3.5%)했다. 미국이 다음 달 기준금리를 0.25% 올려 연 5~5.25%로 높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두 나라 금리 차는 사상 최대 수준인 1.75%포인트까지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금리 차가 커질수록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 자금은 더 높은 금리를 찾아 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문제는 가계부채가 워낙 불어나 있고 경기 침체 우려도 큰 탓에 금리를 올려 미국과 격차를 좁히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박춘성 연구위원은 “(원화 약세는) 우리나라가 금리 차를 좁히기 어려운 여건이라는 것이 외환시장에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이 밖에 4월이 국내 기업의 외국인 배당이 집중되는 시기여서 달러 유출이 평소보다 많다는 점, 글로벌 침체 우려로 위험자산으로 분류되는 원화 수요가 줄고 있는 점도 원화의 매력을 낮추는 요인들이다.
환율 불안이 커지자 13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국민연금공단과 올해 말까지 350억달러 한도의 외환 스와프(맞교환) 거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해외에 투자할 때 한은에서 달러를 빌려 쓸 수 있도록 해서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조달하느라 생기는 원화 가치 하락을 막아보려는 심산이다.
원화 약세를 막으려면 수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당국의 상황 인식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세대 경제학부 성태윤 교수는 “고환율이 이어지다 보니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 있지만, 1300원대의 환율은 분명 위기 신호”라며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확실한 대응 카드를 마련해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