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를 잇는 6824억원짜리 해저터널 사업은 지난 2021년 5수(修) 끝에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했다. 2002·2005·2013·2016년 4차례에 걸쳐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배를 들었는데, 문재인 정부가 2019년 경제성 비중을 줄이도록 예타 평가 기준을 바꾼 뒤 통과된 것이다. 이 터널의 2016년 조사 당시 ‘비용 대비 편익(B/C)’은 0.33에 불과했다. B/C 수치가 1보다 낮으면 투자비만큼 이익을 내지 못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세금 낭비 방어막’으로 통하는 예타 문턱은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여야는 재정 낭비를 막아줄 ‘재정준칙’ 처리를 외면하고 있다. 지난 12일 여야는 기재위 경제재정소위에서 현재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비 지원 300억원 이상’인 예타 기준을 ‘총사업비 1000억원 이상, 국비 지원 500억원 이상’으로 더 완화해주는 데 합의했다. 반면 국가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해 재정 낭비를 막는 재정준칙 처리는 유보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가속기를 점차 세게 밟으면서 과속을 막는 브레이크는 떼낸 것이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금 나라 살림(재정)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에서 재정준칙 법제화도 없이 예타 기준을 완화한다는 건 ‘재정 건전성 포기’란 말과 같다”며 “빚을 떠안을 ‘MZ 세대 독박법’이 될 게 너무 자명하다”고 했다.
◇2000년생 마흔 되면 1인당 6000만원 빚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재정 관리의 둑이 무너지면 미래 세대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재정 적자를 메우려면 세금을 더 징수(현재 세대에게 전가)하거나 국가 채무를 발행(미래 세대에게 전가)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정치권은 현재 세대의 반발을 의식해 증세보다는 국채 발행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영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책사업감시단장은 “예타 기준을 완화하면 불요불급한 사업이 지역 민원 해소나 득표 목적으로 남발될 것”이라며 “지금 당장 부모 세대에게는 좋아 보일 수 있어도 결국 나라 거덜 나고 자기 자식들에게 빚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했다.
예산정책처의 ‘2022~2070 국가 채무 장기 전망’에 따르면, 재정준칙이 도입되지 않을 경우 2000년생이 만 40세가 되는 2040년에 1인당 국가 채무가 5856만원으로, 2022년(2070만원)의 2.8배로 불어난다. 환갑인 2060년에는 1억3197만원으로 급증한다. 반면 재정준칙이 도입돼 잘 지켜질 경우엔 2040년 1인당 국가 채무가 3491만원으로 재정준칙이 없을 때(5856만원)의 60% 수준으로 줄어든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예타 기준 완화로) 국회의원들의 선심성 예산 살포를 부채질하게 될 것”이라며 “재정준칙을 만들어 재정 당국이 예산 낭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했다. 재정준칙이 예타 완화로 재정 적자가 급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세계 105국이 재정준칙 운용
재정준칙은 이미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운용되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105국이 재정준칙을 운용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구(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한 33국 중에서는 한국을 제외한 32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에서는 한국과 튀르키예를 제외한 36국이 도입했다.
준칙 운용은 적자 또는 국가 채무를 일정 수준으로 묶는 방식이 가장 많았고, 이 둘을 동시에 제한하기도 한다. 유럽연합은 재정 적자를 GDP 대비 3% 이내로 제한을 걸어두는 동시에 국가 채무가 GDP의 60%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정부 관계자는 “작년 9월 재정준칙 도입 법안 발의 후 국제기구·국제신용평가사는 재정준칙 법제화 여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며 “올해 법제화 실패 시 국제 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려면 단순히 재정준칙을 제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강력하게 지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직 국책연구원장은 “재정준칙도 만들지 않은 우리나라는 선진국 흐름에 크게 뒤떨어졌다”고 했다.
☞예비타당성조사·재정준칙
예비타당성조사란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국비 300억원 이상)인 공공 사업에 대해 경제성과 지역균형발전 등 경제·사회적 효과가 충분한지 검토하는 절차다. 최근 여야는 이 기준을 1000억원 이상으로 완화했다. 재정준칙이란 나라 살림 적자나 국가 채무가 매년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법률로 정한 기준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