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SM엔터테인먼트의 인기 K팝 그룹 에스파가 공개한 신곡 ‘Salty & Sweet’의 트랙 비디오(뮤직비디오의 일종)에는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전자 부품이 중요 장치로 등장한다. 초록색 투명 젤리 케이크 안에 LED 불빛이 깜빡이는 납작한 보드(센서나 부품을 부착하는 기판)가 있고, 이 보드에 전류가 통하면서 멤버들이 각성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영상에 나타난 보드는 오픈소스 플랫폼 ‘아두이노’를 활용해 만든 것으로, 다양한 반도체를 꽂아 실제로 사용 가능한 제품이다. IT 개발자가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전자 부품이 대중 문화의 핵심 소재가 된 것이다.
반도체, 코딩, 인공지능(AI). K팝 산업이 최근 꽂힌 키워드들이다. K팝 핵심 홍보 수단인 뮤직비디오에서 반도체와 코딩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AI 기술을 활용한 신규 비즈니스 육성에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하이브, SM엔터테인먼트와 같은 엔터사들은 모두 첨단 기술을 미래 먹거리로 내세운 테크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이 소속 아티스트의 결과물에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핫템’으로 등극한 반도체
지난달 10일 공개된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인기 걸그룹 아이브(IVE)의 ‘I AM’ 뮤직비디오에도 반도체가 등장했다. 노래가 최고 하이라이트로 치닫는 순간에 그룹명 ‘IVE’가 새겨진 반도체에 전류가 흐르며 전세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 삽입됐다. 이 영상에 사용된 반도체는 실제 제품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앙 처리 장치(CPU) 형태를 하고 있다. CPU는 컴퓨터뿐 아니라 자동차, 비행기용 전장 부품에도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반도체 업계에선 ‘신기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가 최신 스포츠카, 고급 샴페인 같은 ‘멋진 소품’으로 인식된 것 같다”고 했다. 아이브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손승희 감독은 ‘반도체를 중요 장치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본지 질문에 “반도체가 모든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인 것처럼 아이브 멤버들이 K팝의 핵심 축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답했다. 에스파의 영상을 제작한 라픽(본명 김건희) 감독은 “(알고리즘 등 데이터 산업을 구동하는 반도체는) 매혹적인 중독에 대해 말하는 가사를 가장 현대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소품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K팝도 ‘AI 열풍’
K팝 업계에선 AI를 활용한 신사업 열풍도 불고 있다. 방탄소년단 기획사 하이브는 오는 15일 신규 프로젝트 ‘미드낫’ 공개를 앞두고 “음악과 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형태의 K팝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지난 9일 공개된 미드낫의 ‘마스커레이드(Masquerade)’ 음원 비디오에는 코딩 언어 ‘파이썬’을 활용한 메시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파이썬의 문법을 지킨 이 메시지를 풀이하면 “사랑을 시작 중이라면 중단, 사랑이 끝났다면 로그인 에러, 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계속 사랑하라”는 뜻이 된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따르면 하이브는 이 프로젝트에서 회사가 올 1월 인수한 오디오 생성형 AI 업체 수퍼톤의 기술을 전면에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수퍼톤의 AI는 실존 인물의 목소리를 학습해 다양한 언어로 노래하게 해주거나, 나이대·성별을 바꾸고 아예 새로운 음성을 합성해낼 수도 있다. 예컨대 세븐틴·뉴진스 같은 하이브 소속 가수가 한국어로 노래를 발표하면서 미드낫을 활용해 실제로는 녹음하지 않은 중국어, 아랍어 같은 전 세계 다양한 언어로 부른 노래를 조합해 공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상의 인격을 갖춘 AI 가수는 조만간 일상화될 가능성이 높다. 걸그룹 에스파의 세계관(설정)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 ‘나이비스’가 솔로 데뷔를 앞두고 있고, 지난 1월에는 게임사 넷마블이 AI 기술로 만든 4인조 걸그룹 ‘메이브’가 데뷔했다. 가상 인간이 춤추고 노래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부터 특유의 목소리를 만드는 것까지 전부 AI 기술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국내 주요 엔터사들은 IT기업들과 합종연횡을 하며 K팝과 테크 산업 간의 시너지를 확대하고 있다. 하이브는 네이버와 합작사 ‘위버스컴퍼니’를 세우고 글로벌 팬 936만명이 사용하는 팬덤 플랫폼 위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메타버스 콘텐츠 전문회사 ‘스튜디오 광야’를 출범해 AI·가상현실(VR) 등 혁신기술에 집중 투자를 하겠다고 밝힌 SM엔터테인먼트는 카카오에 인수되면서 K팝과 테크를 접목한 신사업을 더욱 적극 추진한다는 계획이고, 몬스타엑스·아이브 등 유명 아이돌 그룹이 속해있는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핵심 자회사 중 하나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엔터사들은 팬 플랫폼을 직접 구축하고, 원격 팬 미팅을 하는 등 기술에 전폭 투자하고 있다”며 “K팝과 테크 산업의 경계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