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가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을 넣고 있는 직장인 김모씨는 작년 금리가 높을 때 퇴직연금 적립금을 정기예금에 넣어 놨다. 그런데 이번 달부터는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이 의무화되면서 예금이 만기되면 퇴직금을 어떻게 굴릴지 미리 정해 놔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씨는 “예금만 넣자니 수익률이 아쉽고 혼자서 굴리자니 재테크 초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오는 12일부터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이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디폴트 옵션은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미리 선택한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 투자되도록 하는 제도다. 작년 7월 시범 도입됐는데, 앞으로는 반드시 지정해야 한다. 한 번만 지정하고 나면 이후엔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았을 때 6주가 있으면 자동 투자된다. 디폴트 옵션이 맘에 들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상품으로 언제든지 갈아탈 수도 있다. 김씨처럼 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가입하고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잠자고 있는 적립금을 굴리자는 취지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그 대상이다. 사업주가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픽=김성규
그래픽=김성규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 자산 비중 조절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회사에서 퇴직연금에 대해 디폴트 옵션을 지정하라는 안내 메시지를 받고, 펀드 등 중·고위험 상품을 디폴트 옵션으로 지정하려고 눈을 돌리는 가입자도 많아졌다. 디폴트 옵션에는 초(超)저위험인 원리금 보장형 상품도 있지만, 수익률이 연 1%대로 낮기 때문이다.

은퇴 시점을 정하고 초기엔 고수익 위험 자산에 투자하다가 설정한 퇴직 시점이 다가오면 채권 등 안전 자산으로 옮기는 타깃데이트펀드(TDF)가 대표적이다. TDF는 펀드 이름 뒤에 2040, 2050 등으로 숫자가 붙어 있다. 이 숫자는 은퇴 목표 시점을 의미하는데, 펀드 이름에 붙는 은퇴 시점(빈티지)이 멀수록 현재 투자하는 위험 자산 비율이 높아지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디폴트 옵션 지정 의무화를 앞두고 TDF는 올 1분기 순자산 11조원을 기록했다.

5일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년 수익률은 ‘KB온국민TDF2055′가 14.75%로 가장 높았다. ‘삼성한국형TDF2050(13.6%)’ ‘신영TDF2040(12.98%)’ ‘NH-Amundi하나로TDF2050(12.61%)’도 1년 수익률이 높은 TDF였다.

◇‘분산에 분산’ 노린 EMP

국내외 상장지수펀드(ETF)를 이용해 분산 투자하는 EMP(ETF Managed Portfolio) 펀드들도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많이 들어가 있다. 이 상품은 자산의 절반 이상을 ETF를 통해 투자한다.

ETF 자체가 이미 특정 국가 증시나 특정 업종을 대상으로 분산 투자하는 것인데, 그런 ETF를 여럿 골라 묶었으니 위험 분산 효과가 더욱 커진다고 금융회사들은 설명하고 있다. 연 6~8% 수익을 목표로 하는 중위험·중수익 상품이다.

EMP 펀드로는 IBK자산운용의 ‘IBK플레인바닐라EMP’ 펀드가 잘 알려져 있다. 배당이 높은 자산에 상당 부분을 투자해, 안정적 배당수익을 노리는 게 특징이다.

삼성자산운용의 ‘삼성밀당다람쥐글로벌EMP’ 펀드도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시장 상황에 따라 ‘밀고 당겨’ 조절한다. 경기 침체기에는 주식과 채권을 6대4로, 회복기에는 7대3으로 가져가는 식이다. 이 펀드의 올해 초 이후 수익률은 12.6%이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디폴트 옵션으로 제공되는 금융 상품은 크게 원리금 보장형 상품과 펀드 상품으로 나눌 수 있다”며 “금융회사가 제시하는 여러 디폴트 옵션 상품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하나 골라서 지정했다가 마음이 바뀌면 다른 것으로 바꿔 지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디폴트옵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미리 선택한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 투자되도록 하는 ‘사전 지정 운용 제도’를 가리킨다. 가입자 무관심 속에 잠자고 있는 돈을 굴리자는 취지로 오는 12일 본격적으로 도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