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의 인공지능(AI) 산업 발전을 억제하기 위한 초강력 반도체 수출 통제안을 17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지난해 10월 내놓은 수출 통제 초안의 허점을 촘촘하게 메꾼 최종안이다. 수출 금지 품목을 저성능 반도체로 확대하고, 수출 제한국과 기업 목록을 늘리며 AI 개발에 필수인 반도체가 중국으로 흘러가는 모든 경로를 원천 봉쇄했다.
미국의 통제안에 충격을 받은 건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었다. 최대 피해자로 꼽히는 엔비디아는 장중 한때 주가가 7.8% 급락하며 지난 12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한데 이어 18일도 하락세로 출발했다. 엔비디아는 2분기 기준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이 20%를 넘는다. 반도체 업황을 보여주는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통제안 발표 직후 97포인트 급락하면서 시가총액이 730억달러(약 99조원) 증발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중국에서 거액을 벌어들여온 미국 반도체 회사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중국 당국은 즉각 반발했다. 주미 중국 대사관은 성명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자의적 통제 및 강제적 디커플링은 시장경제 원칙과 공정 경쟁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브로드컴이 중국의 보복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더 촘촘해진 반도체 수출 규제
전문가들은 “반도체 수출 통제의 핵심은 모든 우회로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미국이 이번 통제안에서 우선적으로 막은 것은 엔비디아의 중국 판매용 저성능 AI 반도체 A800·H800이다. 이 두 칩은 AI의 훈련·운용에 사용하는 데 충분할 만큼 컴퓨팅 성능은 뛰어나지만, 연산을 처리하는 연결 속도가 엔비디아 최첨단 칩 A100·H100보다 훨씬 느리다. 미국의 기존 수출 통제 기준이 컴퓨팅 성능과 연결 속도를 함께 고려했기 때문에, 엔비디아는 기술적 조정을 통해 A800·H800처럼 느리지만 강력한 AI 칩들을 중국에 판매했다. 하지만 미국은 최종안에서 속도 기준을 삭제하고, 컴퓨팅 능력이 높은 모든 칩을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결과 엔비디아가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는 반도체 품목은 최첨단 2종에서 7종으로 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새로운 수출 통제 기준인 ‘성능 밀도(단위 크기당 성능)’를 도입했다. 중국이 수출 통제에 포함되지 않은 연산, 저장, 전력 등 기능별 반도체를 사 모은 뒤 후공정에서 레고를 쌓듯 고성능 반도체를 조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수출 통제 기준에는 미달하지만, 기준에 근접한 저성능 칩을 수출할 때도 정부에 보고해 허가를 받도록 명시했다. 중국 외에도 수출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국가·기업도 크게 확대됐다. 중국의 반도체 구매 ‘우회 루트’가 될 수 있는 이란·러시아·아랍에미리트(UAE) 등 40여 국이 수출 통제 대상으로 지정됐다. 또 제품을 구입하는 기업이 중국 등 이른바 ‘문제 국가’에 본사를 두고 있을 경우 미 정부의 허가 없이 제품을 판매할 수 없게 했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자족도 봉쇄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자체 개발 가능성도 원천 봉쇄했다. 네덜란드·일본과 함께 첨단 반도체 생산에 사용하는 노광·식각·증착·세정 등 12개 공정별 핵심 장비를 수출 통제 대상으로 추가했다. 지금까지 중국 판매가 가능했던 네덜란드 ASML의 심자외선(DUV) 장비도 막혔다. DUV는 ASML의 최첨단 반도체 장비인 극자외선(EUV) 장비보다는 성능이 떨어지지만, 최근 중국 화웨이가 내놓은 스마트폰 신제품 ‘메이트 60′에 탑재된 반도체를 제조할 때 쓰이는 등 중국 반도체 자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이와 함께 중국 반도체 스타트업 ‘비런 테크놀로지’ 및 ‘무어 스레드 인텔리전스 테크놀로지’를 비롯한 13사를 무역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를 경우 이 기업들은 반도체를 설계해도 대만 TSMC 등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서 생산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의 광범위한 제재에 대해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매출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이번 조치는 미국 반도체 생태계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