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8일 두산그룹의 지배 구조 개편안에 대해 “(두산이 제출한) 증권 신고서에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 제한 없이 정정 요구를 하겠다”고 밝혔다. 소액 주주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두산그룹 지배 구조 개편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원장은 이날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산운용사 CEO(최고경영자)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두산로보틱스에서) 정정 신고서를 제출받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기본 원칙은 최초 증권 신고서 제출 시 부족했다고 생각한 부분, 즉 구조 개편의 효과, 의사 결정 과정, 그로 인한 위험 등에 대해 주주들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밸류업 정책의 뺨 때리는 것” 평가
두산 지배 구조 개편의 핵심은 알짜 기업인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떼내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는 방안이다. 밥캣은 지난해 매출이 10조원에 육박하고 영업이익이 1조3000억원을 넘지만, 로보틱스는 매출 530억원에 19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하지만 시가총액은 로보틱스가 밥캣보다 크다. 주식 교환 비율은 법적으로 시총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밥캣 기존 주주들은 합병에 찬성할 경우 주식 1주당 로보틱스 주식 0.63주를 받는다. 반대하면 1주당 5만459원에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식을 정리하기 싫으면 흑자 기업인 두산밥캣 주식 3주를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 기업 2주로 강제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두산밥캣과 두산에너빌리티 소액 주주들은 이 같은 지배주주 개편안이 주주 이익을 침해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밥캣이 좋은 회사인데 주가가 낮게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오래 보유하려던 주식 투자자들이 합병 찬성이냐 반대 매각이냐의 양자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했다.
시장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자본시장법의 상장 회사 합병 비율 조항을 최대로 악용한 사례”라며 “두산은 밸류업에 얼음물을 끼얹고 있다. 이것이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라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유권자들에게 더 나은 주주수익률을 약속한 윤석열 대통령의 ‘뺨을 때리는 것’”이라는 시장의 평가를 보도하며 정부의 주식시장 밸류업 정책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밥캣의 주가는 미끄러졌다. 합병 계획이 발표되기 전 5만2000원이었던 주가는 8일 29% 떨어진 3만7100원을 기록하고 있다.
◇“지배주주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례”
이 같은 상황에서 금감원이 총대를 멘 것이다. 이 원장은 이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기업 밸류업 등 자본시장 선진화에 대한 범정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기업 경영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정부와 시장 참여자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근절되어야 할 그릇된 관행”이라고 했다. 이 원장이 백브리핑이라는 형식을 빌어 현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 것은 지난 6월 26일 이후 한 달여 만이다.
앞서 금감원은 두산로보틱스에 로보틱스가 공시한 합병과 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신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증권신고서 중요 사항이 거짓으로 기재되거나, 중요 사항이 기재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경우 금감원은 증권신고서를 제출한 회사에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 증권신고서를 금융 당국이 수리해야 증권신고서의 효력이 발생하고, 그 이후 법적으로 신주 발행 등 합병을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다.
두산로보틱스는 지난 7일 정정신고서를 제출했지만, 합병비율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두산밥캣의 기업 가치가 저평가됐다고 주장해온 소액 주주들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간담회에서도 많은 자산운용사 CEO들이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며 “두산로보틱스가 추가 정정 요구에 응하지 않고 합병을 강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신고서로 투자자를 유인한 셈이 돼 문제가 생길 경우 엄청난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두산그룹은 금감원이 증권 보고서를 통과시켜 주지 않으면, 다음 달 하순에 계획했던 주주총회를 열지 못한다는 내부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지금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소액 주주들과 기관 투자자, 정부 당국을 상대로 사업 구조 개편의 진정성을 충실히 설명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