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세법 개정안 96%가 세금을 깎아주는 ‘감세 법안’인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기업들의 실적 부진에 따른 법인세 세수 감소 등으로 국가 채무가 1200조원에 육박한 가운데, 여야가 경쟁적으로 감세 법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와 여당의 상속세·종합부동산세 감세 정책을 비판해온 야당이 제출한 감세 법안이 여당보다 많았다.
25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여야 의원들은 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날까지 148건의 국세·관세(지방세법 제외)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가운데 95.9%인 142건은 상속세 공제 금액을 높여 세금 부담을 줄이거나 법인세 세율을 낮추는 등 감세 법안이었고, 6건은 감세나 증세로 분류되기 어려운 ‘세수 중립’ 법안이었다. 증세 법안은 개별소비세 부과 대상에 니코틴을 원료로 한 담배를 추가하는 개별소비세법 개정안 1건에 불과했다.
감세 법안은 가족 수가 많을수록 세 감면 혜택을 늘리는 소득세법 개정안, 세율을 낮추거나 감면 대상을 늘리는 법인세법 개정안, 상속세 세율을 낮추거나 공제 규모를 늘리는 상속세및증여세법 개정안 등이다. 이 가운데 51.4%인 73건은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 등 야권이 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감세안은 44.4%(63건)였다. 나머지 6건(4.2%)은 여야 의원들이 공동 발의했다. 반도체 투자 기업의 세제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은 사안들이다. 거대 야당까지 감세 입법 경쟁에 가세하면서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2022년 말 1000조원을 넘어선 국가 채무는 세수 결손을 보충하기 위한 정부의 적자성 국채 발행이 이어지면서 올해 말 12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감세 법안의 절반 이상은 문재인 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소득세를 중심으로 증세 드라이브를 걸었던 민주당 의원들이 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지난달 정부가 상속세 완화 방안과 밸류업(기업 가치 상승) 기업 법인세 인하 등 4조원대 감세안을 내놓자, “부자 감세”라고 비판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세청 차장을 지낸 임광현 의원은 26일 ‘재정위기 윤석열정부의 3 년 연속 대규모 감세 , 누구를 위한 조세정책인가’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임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지난 3 년의 세법 개정안에서는 누적 합계 100조원 가까운 세수 감소가 예상되고 있어, 국가의 과세기반을 위태롭게 하고 결과적으로 서민과 중산층에 대한 세제 지원이 축소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민주당이 정책 프레임을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와 대비된 ‘서민·중산층 감세’로 설정하고 표심 잡기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 ‘서민·중산층 감세’ 표방한 野
오문성 한양여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야권이 세제의 큰 흐름에서 서민과 중산층의 부담을 경감시켜주겠다는 기조를 내세워 정책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민주당이 낸 감세안 일부는 ‘민생 감세’를 내세우고 있다. 물가 상승에도 16년째 그대로인 1인당 인적공제(150만원)를 두 배로 늘리자는 소득세법 개정안, 육아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맞벌이 부부의 신용카드 사용금액 소득공제 확대안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초등학생 예체능 학원비를 교육비 세액공제 대상에 추가하는 소득세법 개정안 등이 이런 경우다. 주택담보대출 이자 상환액 소득공제 대상 주택 기준을 취득 당시 공시가격 6억원 이하에서 9억원 이하로 확대하는 소득세법 개정안 등은 주택 구입자들의 고금리·고물가 부담을 덜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정부안보다 강한 감세안을 내놨다. 임광현 의원은 5억원의 상속세 일괄공제 금액을 8억원으로, 5억원인 배우자공제 최고 금액을 10억원으로 높이는 상속세및증여세법 개정안을 지난 22일 발의했다.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서 일괄공제와 배우자공제 규모를 그대로 둔 채 1인당 5000만원인 자녀 공제를 5억원으로 높이는 안을 냈다. 상속 자녀 수가 줄어드는 추세를 고려하면 임 의원안의 감세 규모가 정부안보다 더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령 배우자와 외아들이 상속받는 경우 공제액은 정부안이 12억원(기초공제 2억원+자녀 공제 5억원+배우자 공제 5억원)인데, 임 의원안은 18억원(일괄공제 8억원+배우자 공제 10억원)에 달한다. 자녀가 둘인 경우도 정부안(17억원)보다 임 의원안의 공제 규모가 크다. 상속·증여세법에 따르면, 상속인들은 기초공제와 자녀공제와 배우자공제를 합친 금액, 자녀공제 없이 일괄공제와 배우자공제를 합친 금액 중 유리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감세 입법 경쟁에 뛰어들면서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2일 상속세 일괄공제와 배우자 공제를 각각 현행의 두 배인 10억원으로 높이는 개정안을 냈다. 현재 10억원인 상속세 공제액을 20억원으로 높이자는 것이다.
◇”포퓰리즘 감세 경쟁, 도 넘었다”
여야의 감세 경쟁이 국가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세금 깎아주기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인데, 세수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은 포퓰리즘 성격이 다분하다”고 했다.
여야의 인기 영합적 감세 경쟁은 세수 결손에도 국가 채무 증가 폭을 최소화하려는 정부 계획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정부 동의를 받지 않으면 국회 마음대로 늘릴 수 없는 예산과 달리, 세법 개정은 정부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정치권이 감세 법안 처리를 강행하면 막을 방법은 없다”면서도 “여야 의원들에게 어려운 재정 상황과 정부 입장을 소상히 설명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