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금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골드바 품귀 현상까지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은행은 금을 사들이는 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13일 한은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한은이 금을 사들인 건 12년 전이다. 2013년 20t의 금을 추가로 사들인 뒤 금 보유량을 총 104.4t으로 묶어왔다. 지난달 말 기준 한은이 보유한 금은 47억9000만 달러(약 7조원‧매입 당시 가격) 규모로, 전체 외환보유액의 1.2%에 그쳤다.
한은의 기조는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금을 사들이는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세계금협회(WGC)가 68개국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4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관의 69%가 “향후 5년 안에 금 보유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금 보유국인 미국은 2024년 기준 8134t에 달하는 금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막대한 금 보유량을 통해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자국 외환보유고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75%에 달한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중국 역시 금을 사들이고 있다. 작년 한 해 33.9t을 사들여 외환보유고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6% 수준까지 높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경제 제재에 맞서 금을 전략적으로 활용했고, 작년 기준 2336t의 금을 보유해 외환보유고 대비 금 비중이 32%에 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은이 금 매입에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다 보니 한은의 금 보유량 순위는 2013년 말 세계 32위에서 작년 말 38위로 여섯 계단이나 하락했다. 국내 외환보유액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해 상위 40위권 중앙은행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 10일 국제 금값은 온스당 2911달러를 넘어서는 등 올해 들어서만 7번이나 최고치를 쓰며 연일 치솟고 있다. 금 수요도 폭증하면서 한국조폐공사는 11일 주요 시중은행에 골드바 판매 중단을 알렸다. 금 원자재 수급 문제 때문이었다.
정치권에서는 금 보유 수준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위해 미국 국채 비중을 축소하면서 금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며 “미·중 간 화폐 전쟁이 재점화되면서 상대적 안전자산인 금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늘어난 상황이다. 한은도 금을 전략자산 삼아 그 보유 비중을 최소 5% 수준으로 확대할 것을 즉각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낮은 유동성‧높은 변동성…’급값 폭락’ 과거 트라우마도
한은 관계자들은 금 매입에 신중한 이유로 우선 낮은 유동성을 꼽았다. 금은 주식이나 채권과 비교해 즉시 현금으로 바꾸기 어렵다. 상시 현금화가 필수인 외환보유액 성격상 유동성이 낮아 매력이 떨어진다는 게 한은 판단이다.
특히 요즘처럼 환율 방어를 위한 시장 개입이 자주 이뤄지는 상황에서 유동성은 더 큰 고려 요소가 될 수 있다.
한은 측은 높은 변동성도 취약점으로 꼽는다. 최근에는 가격이 꾸준히 올라 안전자산으로 불리지만, 단기적으로 급등락하는 경우도 빈번하다는 것이다.
뼈아픈 과거도 있었다. 한은은 2011~2013년 금을 총 90t 사들였다. 2000년대 초 온스당 200달러대였던 국제 금 가격이 2011년 1900달러에 육박하자 금 매입 요구가 높아졌고, 마침 외환보유액도 전보다 넉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금 가격은 2015년 온스당 1000달러대로 곤두박질쳤다.2021년 들어서야 완만한 상승세에 들어섰고, 최근 트럼프발(發) 관세 전쟁이 격화되면서 국제 금값이 급격하게 올랐다.
한은 내에서는 과거 투자 사례로 인해 금 시세의 높은 변동성을 경계하는 기류가 강해졌다고 한다. 금값이 또 언제 하락세로 돌아서 외환보유액에 막대한 타격을 줄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다만, 한은은 금 추가 매입 여지를 아예 닫아놓지는 않았다. 한은 관계자는 “시장 여건을 주시하면서 중장기적 관점에서 금 추가 매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