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신선대부두에 수출입 화물 선적 중인 컨테이너선. /연합뉴스

‘1%대 성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실력’이라는 25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주장에, 대다수 경제 전문가는 “20년 전부터 제기됐던 경고가 결국 현실화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총재는 신(新)산업 부재와 지지부진한 노동생산성을 한국 경제 실력 저하의 원인으로 짚었다. 그는 “새 산업을 도입하려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고 누군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그 사회적인 갈등을 감내하기 어려워서 다 피해 왔다”며 “더 높은 성장을 하려면 어렵더라도 구조 조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20년 전과 판박이인 주력 산업

작년 하반기부터 한국 경제 성장이 크게 꺾인 것은 반도체 수출 부진이 가장 큰 요인이다. 반도체는 한국 전체 수출의 16% 정도를 차지하는 수출 1위 품목이다. 반도체 경기에 따라 전체 수출과 경기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20년 전인 2005년에도 반도체는 수출 1위 품목이었다. 2005년과 작년,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을 비교하면 컴퓨터가 제외되고, 가전제품이 새로 진입한 것 외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1980년대와 비교할 때 2000년대에는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컴퓨터, 석유화학, 자동차 부품 등 다섯 품목이 수출 톱 10에 새로 진입했다. 그만큼 산업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픽=백형선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고부가가치 산업 비율 확대가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1960년대에는 철광석 빼고는 수출할 품목이 딱히 없던 한국이 이후 선박, 자동차, 반도체 제품 등으로 주력 산업을 바꾸며 경제 성장을 이룬 것과 달리, 지난 20여 년간은 기존 제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로 산업 생태계가 경직됐다는 것이다.

고인물 같은 한국 경제의 모습은 미국과 비교하면 도드라진다. 미국의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중 애플,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알파벳(구글), 메타(페이스북), 테슬라, 브로드컴 등 8곳이 최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빅테크’ 기업이다. 이 중 애플과 MS를 제외한 6곳은 1990년대 이후 설립된 ‘젊은 기업’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변화는 더욱 눈에 띈다. 엑손모빌, 웰스파고, JP모건체이스 같은 금융·에너지 전통 기업들이 대거 톱 10에서 탈락하고 인공지능(AI)과 전기차 등 첨단 기술 기업으로 재편에 성공했다.

반면, 한국은 현대차와 기아, KB금융 등 전통 제조업과 금융업이 여전히 강세다. 반도체를 제작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긴 하지만 미국 기업과 비교하면 빅테크보다는 ‘제조업’에 가깝다. 1990년 이후 창립된 기업은 셀트리온·네이버 등 4개지만,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대기업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삼성전자는 20년 넘게 시가총액 1위를 하고 있다.

고인물은 썩기 쉽다. 작년 3분기 기준 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조차 못 갚는 이른바 ‘한계 기업’은 상장사 중 19.5%로 집계(한국경제인협회)됐다. 지난 2016년에는 7% 정도였는데 8년 새 2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OECD 하위권 노동생산성

생산성 떨어지는 노동시장도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36.9시간으로 미국(34.6), 일본(31.2), 영국(29.3), 독일(25.7)을 웃돈다. OECD 국가 중 6위다. 하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23년 기준 51달러로, OECD 37국 중 26위에 그친다. 미국은 83.6달러로 한국의 1.6배다. 한국은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72.9달러)에 20달러 넘게 뒤진다.

노동생산성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총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으로, 노동자 1명이 1시간 동안 국부의 증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보다 덜 생산적인 방식으로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거나, 한국의 산업 구조가 저부가가치 부문에 치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서비스업의 영세성이 두드러진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49.6%로 OECD 조사 대상 35국 중 34위였다. 서비스업 내에서도 고부가가치로 분류되는 정보통신업, 전문 과학·기술 서비스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4.5%, 6.2%로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속한다.

이정민 서울대 교수는 “인구가 성장하고 발전할 때는 문제가 덜 됐지만, 인구가 줄어들고 성장 잠재력이 위협받는 지금은 우리가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노동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도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진단은 하나같은데,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해법이 극과 극이어서 외부 충격 없이는 구조 조정이 힘들다는 지적도 많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산업 구조 조정과 노동생산성 증진은 필연적으로 탈락하는 쪽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적 대타협 없이는 추진하기 어렵다”고 했다.

☞노동생산성

국내총생산을 총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노동자의 숙련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며, 생산의 효율성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