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금융 당국 내부의 잡음이 여과 없이 분출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을 ‘직을 걸고’ 지키겠다며, 상급 기관인 금융위원회와 엇박자를 내고 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상법 개정안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정부가 그간 추진하던 자본시장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금감원장, 금융위원장과 딴 목소리
26일 이복현 원장이 포문을 열었다. 그는 오전 MBC 라디오에 출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에 미련을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 (주주 가치 보호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의심받을 것이고, 결국은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이 원장은 앞서 13일에도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통과된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에 대해 ‘직을 걸고’ 반대하겠다고 해 여당인 국민의힘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후 이 원장은 재계 단체인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가 사실상 거절당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그는 이날 “한경협이 (상법 개정안을) 한국에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라는 식으로 가짜 뉴스 같은 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의 정부 입장과 다른 것이다. 정부는 국내 증시에 상장된 2600여 법인의 합병·분할 과정에서 소액 주주의 권익을 더 보호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내놓은 상태다. 민주당 뜻대로 상법을 개정해 전국 100만 회사의 모든 의사 결정을 제한하는 대신, 상장 법인에 국한한 규제 방안을 택한 것이다.
이 원장이 라디오 전파를 탄 지 2시간 뒤 이번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김 위원장은 “(상법 개정안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로 자본시장법과 함께 여러 대안을 놓고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말했다”며 “현재도 그 입장은 같다”고 말했다.
그간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8단체는 상법 개정안으로 소송 남발 우려가 크다고 지적해 왔다. 경제 단체 관계자는 “상법이 개정돼 주주 충실 의무가 생기면 주주들이 손해를 볼 때마다 크고 작은 소송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소송을 당할까 봐 주가 등에 단기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도전적인 결정은 내리지 않고 현상 유지에 급급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반영해 김 위원장은 상법 개정보다는 그 대안으로 정부가 마련한 자본시장법 개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다만 김 위원장은 “상법 개정과 관련해 거부권 행사 여부와 관련해선 어차피 소관 부처가 법무부이고, 해당 부처와 여러 기관의 의견을 들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결정할 일”이라며 “이 때문에 금융위원장이 행사 여부에 대한 의견을 공개적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건 적절치 않다”고 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당국 수장들의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발언들이 자꾸 튀어나오면 금융시장에 혼선만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금융권 일각에선 “금융위가 금감원의 상위 기관인데, 위아래가 다른 말을 하는 건 콩가루 집안 같다”는 말도 나온다.
◇금감원은 상법 개정안 엄호 나서
이날 금감원은 ‘주주 가치 보호 관련 주요 입법례’라는 제목의 참고 자료를 내고 이복현 원장을 엄호했다. 야당의 상법 개정안이 참고한 미국 델라웨어주의 회사법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소개하는 내용이다.
◇“금융시장에 혼선만 초래”
2022년 기준 S&P500 기업 중 65%가 델라웨어주에 설립될 만큼 위상이 높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델라웨어 회사법은 미국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각국 회사법의 모범 기준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재계 시각은 다르다. 델라웨어 회사법이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조치를 허용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본사를 델라웨어주에 둔다는 것이다. 차등의결권은 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을 받는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배임죄도 없기 때문에 한국 상법과 델라웨어 회사법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없다”며 “금감원이 왜 자기 업무도 아닌 상법에 관여하는지, 왜 델라웨어 회사법의 일부분만 떼어내서 언론에 자료를 배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상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해 지난 21일 정부 손에 넘어갔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보름 안인 다음 달 5일까지 법안을 공포하든, 다시 국회로 돌려보내 재의를 요구하는 거부권을 행사하든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