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미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 photo 뉴시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권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미·중 디커플링 시대’를 맞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각각 중국과 미국을 찾아 그 배경이 주목된다. 먼저 재계 1위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지난 3월 23일 중국 베이징을 찾아 ‘중국발전고위급포럼(CDF)’에 참석했다. CDF는 지난 2000년부터 중국 국무원 주도로 열리는 대중 투자유치 행사로, 연중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뒤를 이어 열리는 행사다.

이날 베이징 조어대(釣魚台) 국빈관에서 열린 포럼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중국공산당 서열 2위 리창(李强) 국무원 총리가 직접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는 이재용 회장을 비롯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혹 탄 브로드컴 CEO 등 글로벌 CEO 80여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용 회장이 CDF에 참석한 것은 2023년에 이어 2년 만이다.

반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3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매머드급 대미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루이지애나주),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 등과 나란히 선 정 회장은 루이지애나주에 현대제철 제철소를 건립하고, 지난 3월 26일 준공한 조지아주의 현대차 메타플랜트 공장을 증설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210억달러(약 31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위대한 기업 현대와 함께하게 돼 큰 영광”이라고 정 회장을 소개하자,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는 미국 산업의 미래에 더 강력한 파트너가 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이 자리에는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 성 김 대외협력 사장(전 주한 미국대사),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 등도 배석했다. 워싱턴 일정을 마무리한 정 회장은 3월 26일에는 조지아주 서배너로 날아가 조현동 주미대사,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 등과 함께 현대차 메타플랜트 공장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지난 3월 23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열린 ‘중국발전고위급포럼(CDF)’에 참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팀 쿡 애플 CEO(왼쪽). photo 바이두

삼성, 커지는 중국 시장 비중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각각 중국과 미국을 찾은 이재용 회장과 정의선 회장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지난 2월 삼성바이오로직스 부당합병 항소심(2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사실상 사법리스크를 떨쳐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 회장은 최근 반도체 부진과 관련해 임원들을 상대로 ‘사즉생(死卽生)’ 각오를 밝힌 바 있다. 그후 첫 해외순방지로 중국을 선택한 것.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西安)과 쑤저우(蘇州)에서 각각 낸드플래시와 패키징 라인을 운영 중인데, 중국은 삼성 반도체 최대 고객이기도 하다.

이재용 회장은 CDF 개막에 하루 앞선 지난 3월 22일에는 베이징에 본사를 둔 가전기업 샤오미(小米)의 레이쥔(雷軍) 회장과도 별도 회동했고, 3월 24일에는 선전을 들러서 전기차 기업 비야디(BYD)의 왕촨푸(王傳福) 회장과도 별도로 만났다. 전기차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한 샤오미나 세계 최대 전기차 기업인 BYD는 삼성전자의 자동차 전장사업과 관련한 주요 고객사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로 중국 기업들이 반도체 재고확보에 사활을 걸면서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중국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에 비해서도 더 커졌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대중수출액은 64조9275억원으로 2023년(42조2007억원)에 비해 50% 이상 급증했다.

지난해 대미수출액(약 61조3533억원)을 넘어서는 규모다. 미국 엔비디아에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납품하는 SK하이닉스의 전체 사업비중에서 미국 시장 비중이 커진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SK하이닉스에 비해 HBM 개발 경쟁에서 한발 뒤처진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아직 자사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관세장벽 부딪힌 현대차

현대차는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태’ 이후 중국 시장 판매가 급감한 것이 역설적으로 미국 시장에 올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현대차와 기아의 지난해 중국 시장 판매량은 각각 15만대와 24만대에 불과하다. 양사의 도합 판매량도 39만대에 그치는데, 특히 큰형인 현대차는 중국 내수보다 수출로 방향을 돌린 기아에 비해서도 판매가 밀렸다. 그 결과 현대차·기아는 오는 4월 열리는 중국 최대 모터쇼인 ‘오토 상하이’에도 불참을 결정했다. 2002년 중국 시장 진출 이후 최초다.

반면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는 각각 91만대와 79만대를 판매했다. 양사의 미국 내 도합 판매량만 170만대로 GM, 도요타, 포드에 이어 미국 시장 4위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자동차와 철강, 알루미늄 등을 대상으로 25%의 관세폭탄을 공언하면서 현대차로서는 관세장벽을 넘기 위해서라도 미국 내 생산을 늘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오는 4월 2일부터 자동차 관세가 부과되고, 향후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재개정에 착수하면 국내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에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연산 270만t급 전기로 일관제철소를 루이지애나주 어센션에 세우고, 연산 30만대 규모의 조지아주 서배너 공장도 곧장 연산 50만대 규모로 끌어올리기로 한 것이다. 루이지애나주와 조지아주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현대차),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기아)에 있는 기존 생산라인과도 가깝고, 집권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남부 ‘선벨트’에 속해 있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도 좋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 측은 “이번 투자를 통해 미국 제조업 재건 등 미국 행정부의 정책에 대응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 기회를 확대해 미국에서 톱티어 기업으로서 위상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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