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세계 각국에 유례없는 관세 전쟁을 선포한 뒤 경제 침체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는 올해 미국 성장률 전망치를 한꺼번에 1.6%포인트 내린 -0.3%로 5일 하향 조정했다. 중앙은행인 연준 전망(1.7%)보다 훨씬 낮다.
관세전쟁 개전 후 3~4일 이틀 동안 미 주식 시장 시가총액은 6조6000억달러(약 9600조원) 줄었다. 한국 주식시장 시가총액(2372조원)의 네 배 정도 돈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뉴욕 증시 3대 지수는 이틀간 10%가량 빠졌다. 다우(-9.3%), 나스닥(-11.4%), S&P500(-10.5%) 지수의 이틀간 하락 폭은 유럽의 유로스톡스(-8%), 일본 닛케이평균(-5.4%)의 하락 폭을 웃돌았다. 특히 S&P500의 4일 하루 낙폭(-6%)은 2000년 4월 닷컴 붕괴 때(-5.8%)나 2001년 9·11 테러 당일(-4.9%)보다 크다.
◇“이건 경제 혁명, 버텨내라“… 트럼프, 시장과 정면 대결 택해
트럼프 관세 폭탄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자국 증시부터 초토화한 모양새다. 트럼프 관세가 미국 물가 상승과 소비 둔화로 이어져 경기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7일 개장하는 아시아 증시가 ‘블랙 먼데이’ 공포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증시뿐 아니다. 미국 경제 패권의 교두보인 달러 가치는 하락했고,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급락하며 향후 경기 우려를 뚜렷하게 반영했다.
오는 9일부터 본격적으로 상호 관세가 적용되지만, 트럼프의 관세 위협이 ‘협상 엄포용‘으로만 그칠 가능성은 줄고 있다. 6일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관세 전쟁은) 경제 혁명”이라며 “버텨내라”고 했다.
트럼프가 시장과의 정면 대결을 선택한 뒤, 글로벌 자산 가격 폭락세는 전방위적이다. 6일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의미하는 달러 인덱스는 103 수준으로 하락했다. 올 초 110 가까이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약(弱)달러가 완연하다. 연 4.2% 선이었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한때 연 3.87%까지 급락하며,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글로벌 경제에 불확실성이 가중될 때 어김없이 상승했던 대표적인 안전 자산인 금(金) 가격도 주저앉았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금 선물은 3% 하락한 온스당 3024달러에 마감했다. 연이틀 이어진 증시 폭락에 유동성 부족에 빠진 투자자들이 금을 팔아 현금을 챙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픽텟에셋 수석 전략가 루카 파올리니는 블룸버그에 “시장이 피를 흘리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돈 벌기 좋은 시점” 방어
트럼프는 꿋꿋하게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있다. 주식시장 폭락이 시작되던 4일에는 “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켓이 붐을 일으킬 것”이라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쓰더니, 이튿날에는 “많은 투자자들이 미국으로 와서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돈을 벌기 좋은 시점”이라고 썼다.
트럼프는 평소 주식시장보다는 채권시장의 금리 하락에 주목해왔다. 그는 지난달 의회 연설에서 미 국채 10년물 금리 하락에 대해 “오늘 금리가 아주 큰 폭으로 하락했다. ‘크고 아름다운 하락‘”이라고 했다. 낮은 국채 금리는 미 연방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미 의회예산처에 따르면 올해 연방 정부의 이자 부담은 9520억달러(약 1400조원)에 달한다. 올해 국방비 8500억달러(1240조원)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부담이 크다. 시장에서 국채 금리가 떨어질수록 연방 정부가 지급하는 이자도 줄어들게 된다. 더구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미국 주택담보대출 금리 등에 연결되어 있어, 낮은 금리는 내년 중간선거 등 앞으로 트럼프의 정치 일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달러 가치 하락도 트럼프가 원해왔던 것이다. 트럼프의 목표는 관세를 올려 미국 제조업을 부흥하고 무역 적자를 해소하는 것이다. 달러 가치가 약해질수록 수출 시장에서 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
◇달러 패권 약화, 경기 침체 부메랑
하지만 트럼프 기대와 달리 약달러와 낮은 국채 금리는 트럼프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낮은 금리와 높은 채권 가격은 미국의 경기 침체로 연결될 수 있고, 달러 약세가 수십년간 미국 경제를 지탱해온 달러 패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안전 자산으로 여겨졌던 미 달러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공공연하다.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에서 “거의 100년 동안 달러의 지배력을 뒷받침해 온 가치와 체제가 트럼프와 그 측근들로 인해 불과 몇 달 만에 존속을 의심받고 있다“며 ”미국 무역을 파괴하는 ‘미국 우선’ 관세 정책은 달러 패권 약세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했다.
국채 금리도 트럼프 마음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관세로 기대했던 제조업 부흥보다 미국 내 물가 인상이라는 악재가 먼저 부각될 경우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가 과거 석유 파동과 같은 형태의 경제적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관세 인상으로 물가가 오르고, 결국 고용·투자 감소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필수재보다는 내구재나 서비스 수요가 큰 미국 시장의 특성상 관세로 물가가 오르면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어 결국 트럼프가 원하지 않은 길인 침체로 갈 확률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