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달러당 1500원 선을 위협받던 원화 환율이 최근 1420원대로 하락(원화 가치 상승)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분위기에 달러 약세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화는 달러 약세를 전부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저평가 흐름에 있다. 연초 이후 미국 달러 가치가 9% 넘게 하락하는 동안 한국 원화 가치는 3%가량 상승하는 데 그친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관세 전쟁 불확실성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원화 발목을 잡고 있다. 중국 위안화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많은 원화 특성상 미·중 관계 악화로 인한 위안화 절하(가치 하락) 가능성도 원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한국 원화 여전히 저평가
1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425.5원에 마감했다. 트럼프 상호 관세가 발효된 지난 9일(1484.1원)에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6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일주일도 안 돼 60원 가까이 떨어졌다.
최근의 원화 환율 하락은 미 관세 정책에 따른 달러 약세 때문이다. 달러는 안전 자산으로 여겨지며 국제 금융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전 세계 준비금의 6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갈지자 행보에 미국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달러 표시 자산을 일단 팔아 놓고 보자는 움직임이 달러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올 들어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표시하는 달러인덱스가 가장 높았던 1월 13일과 이달 15일을 비교해 보면 달러 가치는 9.4% 하락했다. 거꾸로 같은 기간 유로화(9.8%), 일본 엔화(9.3%), 스위스 프랑(10.9%) 등의 가치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런데 이 기간 한국 원화의 가치는 2.7% 오르는 데 그쳤다. 이민혁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달러인덱스와 원·달러 환율의 통계적 관계를 고려하면 현재 원·달러 환율의 적정 수준은 1350원 이하”라며 “원화가 글로벌 달러 대비 최소 5% 이상 저평가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원화가 관세 전쟁에 민감한 대표적인 통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인 미·중 간 관세 갈등은 수출 중심 한국 경제에 특히 더 악재다. 전반적인 내수·투자 부진 우려도 원화 가치 회복을 막고 있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까지 침체하면 국내 경제 충격도 심해질 수 있다는 판단 등으로 자금을 빼가는 외국인 투자자들도 환율 고점을 높인다. 이달 들어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스피에서 4조5000억원가량을 순매도(매도가 매수보다 많은 것)했다.
◇미·중 관계에 달린 환율
앞으로 원화 환율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는 결국 미·중 관세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1기 때도 미·중 갈등 국면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오르다가 협상 국면으로 전환되면 환율이 내려가는 양상이 반복됐다”며 “이런 과정을 몇 번 더 겪겠지만 미국은 최근 국채 금리 상승 등으로 입지가 좁아졌고 중국도 더 판을 키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이른 시간 내 협상 모드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트럼프 관세 정책이 협상용이었다는 인식이 좀 더 우세해지면 환율이 조금 더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더 격렬해져 중국이 위안화 절하 카드를 동원하면 한국 원화도 함께 절하(환율은 상승)될 가능성도 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은 미·중 갈등 국면에서는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위안화 절하 카드를 썼는데, 트럼프 1기 때엔 10%가량 위안화를 절하했다”며 “이를 원화 환율에 적용하면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라고 했다. 다만 그는 “지금은 중국도 내수 부진으로 수입 물가 상승 부담이 큰 만큼 1기 때만큼 적극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떨어트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안지은 하나은행 보라매지점 PB부장은 “트럼프의 발언과 중국의 태도에 따라 크게 왔다 갔다 하는 국면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고객들에게도 환율과 연관 있는 투자를 할 때는 조금씩 분할매수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