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두 개. 월마트의 미국 내 4692개 모든 매장과 워싱턴DC 연방의회와 국방부(펜타곤) 건물에 입점돼 팔리는 우리나라 상품은? 올해 해외 매출액만 1조원이 넘는 한국의 유일한 식품 브랜드는?

정답은 모두 농심(農心)의 ‘신(辛)라면’이다. 농심의 올해 해외 라면 매출은 1년 전 보다 24% 늘어난 9억9000만 달러(약 1조900억원, 1달러 1100원 기준)에 달해 연간 총매출의 40%를 차지할 전망이다.

농심은 지난달 글로벌 시장조사기업 ‘유로 모니터’가 발표한 ‘세계 라면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 세계 5위에 올랐다. 1~4위는 캉스푸(康師傅·중국대만 합작), 닛신(日淸·일본), 인도푸드(인도네시아)처럼 1억명 이상 인구 대국 또는 ‘라면 종주국’ 기업들이다. 1974년 ‘농심 라면’으로 뛰어든지 46년 만에 세계 5강이 된 것이다.

농심 '신라면'은 지구 최남단 및 최고봉을 포함한 100개국에서 판매되는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이다. 사진은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현장./농심

홍대순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쟁사들보다 훨씬 적은 내수시장을 둔 농심의 세계 5위 등극은 한국 산업계에서 스포츠로 치면 월드컵 축구 4강에 버금가는 새로운 이정표”라고 말했다.

‘신라면’ 브랜드는 국내 식품상품 중 유일하게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과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지구 최남단인 칠레 푼타아레나스를 포함한 세계 100개국에서 팔리고 있다. 아에로멕시코, 폴란드항공, 브리티시에어웨이 같은 20개가 넘는 외국항공사에도 기내식으로 절찬 공급 중이다.

올해 6월 뉴욕타임스 자회사인 상품전문사이트 와이어커터(Wirecutter)는 농심이 만든 ‘신라면블랙’을 ‘세계 베스트 라면 1위’로 선정했다. 농심은 어떻게 ‘시장 점유율 세계 5위의 글로벌 기업'이 되는 기적을 쏜 걸까.

2005년 6월부터 농심이 가동하고 있는 LA공장 모습. 연간 3억 식의 라면 생산 능력을 보유한 미국 및 캐나다 시장 공급기지이다./농심

◇①‘한걸음 한걸음'...50년 장기전으로 빛 보다

농심의 승전보는 반세기에 걸친 ‘장기전’의 결실이다. 농심은 1971년 재미(在美) 한인(韓人) 시장을 겨냥해 ‘소고기라면’ 수출을 시작으로 쉼없이 세계 시장을 두드렸다. 샌프란시스코 영업사무소(1984년), 미국법인(농심아메리카 설립·1994년), LA현지공장(2005년)으로 10년 마다 세계 최대 라면 시장인 미국 문을 열었다.

지역별 접근법도 달리했다. 아시아에선 도쿄 사무소(1981년), 상하이 법인(1996년) 및 현지 공장, 호주와 베트남 법인 설립 등으로 직접 진출을 꾀한 반면, 유럽에선 테스코·모리슨·아스다(영국), 레베·에데카(독일) 등 메이저 유통 기업 중심 영업망을 구축했다.

농심 관계자는 “장기적 시야에서 서두르지 않돼 할 일은 반드시 하는 치밀함과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임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서부지역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다음, 인근 아시안계 마트와 히스패닉 등으로 시장을 넓히고 월마트·코스트코 같은 주류 핵심 유통 채널 진입이라는 단계적 전략을 구사했다.

농심 미국법인에서 생산하는 농심 '신라면 브랜드' 제품/농심

2005년 LA공장 가동으로 10여년 간 서부 및 교포시장을 중심으로 평판과 노하우를 축적한 뒤 동부 대도시와 북부 알래스카, 태평양 하와이까지 미국 전역에 유통망을 완성했다. 농심 라면은 한인과 아시안을 넘어 미국 소비자들과 메이저 유통기업이 먼저 찾는 글로벌 상품이 됐다. 올해 미국 월마트와 코스트코에서 농심 매출은 각각 47%, 37% 증가했다.

1970년대 홍콩 교민 상대 판매로 대중(對中) 수출 물꼬를 연 농심은 중국에서도 상하이·칭다오·선양 등 연안 대도시로 1차 공략에 성공한 뒤 2018년부터 항저우·우한·충칭 등 서부 내륙 도시로 넓혀나가는 ‘한 걸음씩(step by step) 접근’으로 진격하고 있다.

◇②‘라면의 한국화'로 승부하다

농심은 ‘프리미엄 고가(高價) 전략’과 ‘가장 한국적인 맛’을 고수하며 도약했다. 미국에 먼저 진출한 일본 라면 기업들은 주로 미국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상당수가 3~4개들이 한 팩에 1달러를 받고 팔고 있다.

미국 아티스트 버튼 모리스와 협업해 만든 '신라면' 버스 광고/농심

하지만 농심을 라면을 싸구려 음식이 아니라 스파게티, 파스타 같은 면류(麵類) 식품과 대등하고 한끼 식사가 가능하도록 고급화 전략을 취했다. ‘신라면’ 가격은 미국에서 개당 1달러 정도로 일본 라면 보다 비싸다.

창업자인 신춘호 회장은 “남들 하는대로 따라하지 말고 시간이 걸려도 우리 방식대로 가자. 한국의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고 독려했다. 농심은 실제로 1980년대 너구리라면과 안성탕면, 신라면 등 한국에서 파는 제품을 그대로 외국에 수출해 팔았다. 처음엔 낯설어 하던 미국 소비자들도 신라면의 맛에 매료돼 지금은 미국의 백인, 흑인 등 주류 소비층이 모두 즐긴다.

1988년 200만달러이던 농심의 미국 수출액은 1998년 2500만달러로 급증했다. ‘농심 아메리카’의 올해 매출은 사상 최대인 3억2600만달러 달성이 확실시된다. 32년 만에 163배 성장한 셈이다.

중국에서도 끓는 물을 부어서 면을 익혀 먹는 ‘빠오멘(抱麵)’ 위주의 현지 라면문화에 맞추지 않고 농심은 끓어 먹는 ‘쭈멘(煮麵)’ 방식을 고수했다. 이런 차별화 덕분에 신라면은 오히려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명품(2018년 인민일보)’이 됐다.

미국 구글의 제안으로 제작한 신라면 광고 '맛있는 신라면의 소리(Sound of Delicious Shin Ramyun)'. 도마와 칼, 젓가락을 두드리는 경쾌한 박자에 보글보글 끓으며 후루룩 먹는 소리가 조합돼 한편의 난타(Nanta) 공연을 연상시킨다./유튜브 캡처

◇③예술·바둑 마케팅으로 ‘현지인 마음' 얻다

농심은 “제품은 한국의 매운맛을 그대로 가져가되 광고와 마케팅 등은 철저하게 현지 문화와 트렌드를 중시”하고 있다. 미국에선 2017년 12월 구글의 제안으로 ‘맛있는 신라면의 소리’ 광고를 공동제작하는 등 ‘아트 마케팅'을 구사했다. 자막이나 음성 없이 음악과 춤, 그림 등만을 적용한 이 동영상은 2개월만에 유튜브 조회수 500만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세계적 아티스트 에바 알머슨과 제휴해 ‘맛있는 신라면의 문화’ 광고를, 올해는 팝 아티스트 버튼 모리스와 협업한 광고를 선보였다.

중국에선 인기 스포츠인 바둑으로 뚫고 있다. 1999년부터 한·중·일 국가대항전인 ‘농심 신라면배(盃) 세계바둑최강전’를 매년 열어 14억 인구에 ‘신라면’ 브랜드를 각인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푸드트럭 ‘신라면 키친카’ 운행 같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누적 조회수 4억건이 넘는 일본 라멘 전문 유명 먹방 유튜버 ‘수수루’는 최근 방송에서 “고품질의 수프, 생면 식감이 훌륭하다”며 신라면을 극찬했다.

1999년부터 열리는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2019년 대국 장면. 중국 CCTV 등도 취재할 만큼 현지 반응이 뜨겁다./농심

올해 2월 9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오른 영화 ‘기생충’도 호재였다.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 열풍을 겨냥해 농심은 이틀후 미리 준비했던 11개 언어로 된 ‘짜파구리’ 레시피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짜파게티’ 판매는 올들어 90% 넘게 급증했다.

문경선 유로모니터코리아 총괄연구원은 “코로나19로 해외에서 라면수요가 늘어난 기회를 농심이 잘 붙잡아 각국 시장을 깊숙이 공략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크게 높였다”고 말했다.

◇④세계 베스트 11개 중 4개가 ‘辛라면 브랜드'

농심은 1986년 출시해 30년 넘게 국내 시장 1위인 ‘신라면’을 28년 만인 2014년 맛과 포장, 디자인을 전면 혁신했다. 매운 맛에 우골 설렁탕을 접목한 프리미엄 제품인 ‘신라면블랙’은 출시 6년 만인 2017년, 맛과 품질을 업그레이드했다.

국물 맛을 내는 수프를 전첨, 후첨 두 종류로 나눠 맛과 향을 살렸다. 조리(調理) 전과 후에 넣는 수프를 구분하고 여러 종류의 고급 밀가루를 최적 배합으로 반죽해 탱탱하고 쫄깃한 면의 식감을 살린 것이다. 건더기는 2배 넘게 늘렸다.

‘변위불변(變爲不變·변하지 않기 위해 변한다)’. 맛의 근본은 유지하면서 소비자 기호 변화, 제조기술 발전, 트렌드 변화 등에 맞춰 품질을 개선한다는 농심의 철학 그대로이다.

글로벌 여행전문 웹사이트 '더 트래블'은 2020년 10월8일 '신라면블랙'을 '올해 최고 인스턴트 라면' 중 하나로 꼽았다./더 트래블

올해 6월 셰프와 작가, 평론가 등 7명의 전문가 직접 평가(와이어커터사이트 주관)에서 ‘신라면블랙’이 세계 1위에 뽑힌 것은 이런 노력의 결정이다. ‘세계 베스트11 라면’에는 짜파구리(3위), 신라면건면(6위), 신라면사발(8위) 등 신라면 브랜드 4개가 포함됐다.

농심은 1982년 경기 안성에 세계적으로 희귀한 ‘수프 전문 공장’을 세웠다. 2001년부터는 1분당 최다 600개의 라면을 생산하는 인텔리전트 라면 공장을 경북 구미에 가동 중이다. 영국 BBC방송은 구미 공장에 대해 “첨단 자동화 설비와 고속 라인을 갖춰 라면 제조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 공장”이라며 “신라면의 세계 시장 진출을 앞당긴 전진 기지”라고 밝혔다.

◇오너와 전문 경영인의 ‘合心' 성공 사례

농심이 50여년 만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경영진의 사심없는 몰입과 집중, 단합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술·담배를 하지 않고 골프도 비즈니스 목적으로만 하는 신춘호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나는 연구개발과 제품 콘셉트를 잡아가는데 전념할 테니 여러분은 제품을 잘 팔아달라”며 높은 수준의 R&D와 마케팅을 주문해왔다.

신춘호 농심 회장

1999년 펴낸 자서전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에서 그는 “평생 라면을 만들어왔으니 라면쟁이라고 스스로 부르기를 좋아한다”며 “라면은 서민만 먹는 게 아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들었다”고 했다. 신 회장의 장남으로 2010년부터 농심홀딩스 대표를 맡아 R&D와 인재 양성 등을 총괄하는 신동원 부회장과 1981년 수출과 사원으로 입사해 미국지사장, 국제영업본부장 등으로 글로벌 진출을 이끈 박준 부회장을 비롯한 전문 경영인들과의 협업도 주목된다.

세계 최고 라면 생산 시설과 공정관리 수준을 갖춘 농심 구미 공장/농심

◇“네슬레 같은 글로벌 식품기업 한국에서도 나와야”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농심은 오너와 전문 경영인이 ‘글로벌 진출’이란 목표로 합심(合心)해 성공하는 사례”라며 “잡음없는 경영권 승계도 회사의 경쟁력 증대에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농심의 도약에 대해 ‘식품 산업은 먹거리를 공급하는 국내용 기업이라는 발상의 한계를 깨트리며 한국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강성진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스위스 네슬레는 좁은 국내 시장을 벗어나 연간 200조원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종합식품기업이 됐다”며 “한국에서도 글로벌 식품기업들이 나올 수 있게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최소한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