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온라인으로 열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 신년 기자회견. 암참은 한국에 진출한 800여개 미국 기업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다. 회견 중 전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과 관련한 질문이 나왔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이 부회장의 구속은 한국에서 기업인이 얼마나 많은 형사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라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김 회장은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사장, 한국GM 사장 등을 거쳐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기업 환경에 밝다. 김 회장은 “한국은 ‘컴플라이언스 비용(준법 경영을 위한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많다”며 “CEO들이 한국에서 부담하는 법적 리스크가 홍콩,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크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구속으로 국내 기업인이 감내해야 하는 ‘법적 리스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법·중대재해법·공정거래법 등 법적 규제는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에서 기업인을 옥죄는 정치권의 요구는 예전과 변함이 없다는 지적이다. 재계에서는 기업인에 대한 법적 처벌이 “법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여론재판으로 되고 있다”며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잘못 걸리면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긴장하는 재계 “여론재판에 잘못 걸리면 끝”
이번 일로 주요 그룹 총수들도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주요 그룹의 법무·대관팀은 예상하지 못한 법원 선고 결과에 대한 원인파악 등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5대 그룹 고위인사는 “검찰은 표적수사로 원래 유명했지만, 법원에 대해서는 ‘최후의 보루’라는 실날 같은 희망이 있었는데 이마저 사라졌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일련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 흔히 상식이라고 불리는 최소한의 법적 안정성마저 깨지는 흐름에 대한 우려 목소리도 많았다. 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나 코로나 이익공유제 논의 등을 보면 어떤 사안이든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면 헌법상 기본 개념이 무시되는데, 여기에 이 부회장의 재수감까지 겹쳐 더 충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집행유예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정치와 기업이 확실한 ‘갑과 을(甲乙)’인 한국적 현실에서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하는 기업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이 부회장은 이미 한차례 수감생활을 했고, 법원이 요구한 것을 모두 수용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인사는 “법원이 상법에도, 회사 정관에도 없는 ‘준법감시위원회’라는 해괴한 제도를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더니, 결국 실형을 선고했다”며 “끝까지 여론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한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고 경기 흐름을 반등하기 위해서는 삼성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발생한 총수 부재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한 현대차,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한 SK, 세계 3위 자동차부품기업 마그나와 전기차 합작법인을 설립한 LG그룹과 달리 삼성은 최근 5년간 굵직한 인수합병이 전무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위해 글로벌 기업을 인수합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당분간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업 규제 강화로 기업인 처벌 가능성 커져”
이 부회장의 재판을 계기로 재계에선 “기업인들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상황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중대재해법은 산업재해와 관련해 실질적인 책임에 한계가 있는 CEO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재계 관계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실질적인 책임 소재를 따지기 보다는 여론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공정거래법과 상법 개정으로 주요 주주의 권한은 축소되고, ‘내부 거래' 등의 규제는 더욱 강해졌다.
암참 자료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기업 CEO를 처벌하는 조항은 2200여개에 달한다. 암참은 ’2019년도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경쟁력지수에서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3위였지만 규제 부담은 87위, 규제 개혁에 관한 법률 구조의 효율성은 67위로 규제가 혁신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암참의 김 회장은 “한국에서 일하는 국내외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왜 국내 규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이 부회장의 재판이)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