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업체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1일부터 이탈리아 의류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여성 맞춤 슈트(suit·한 벌 양복) 서비스를 시작했다. 고객이 원단과 안감, 단추와 옷깃 모양을 선택하면, 전문 재봉사가 정장 슈트나 코트로 만들어준다. 이 서비스는 본래 남성 고객에게만 상·하반기 한 번씩 예약받아 제공해 온 특별 행사였다. 그러나 여성 고객 중에서도 맞춤 정장을 찾는 사람이 늘자, 이 서비스를 여성에게까지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최근 여성 슈트 매출이 매년 50~60%씩 늘고 있다”며 “특히 연말·연초에 대기업 임원이 된 여성들이 슈트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국내 패션 시장에서 여성용 슈트 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최근 여성 임원 수가 급격히 늘면서, 슈트를 찾는 여성 고객이 늘어나는 것이다. 패션 업체 관계자는 “고위층에 오른 여성들이 예쁜 모습보다 강한 매력을 강조하는 소위 ‘성(性) 중립 패션’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임원 300명 시대… ’슈트’가 팔린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산하 주요 수입 브랜드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의 여성용 정장과 바지 판매는 최근 5년 동안 2배 이상 늘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5년 전엔 치마·드레스·카디건의 매출 성장세가 두드러졌지만, 최근 코로나 상황 속 여성복 시장에서는 정장과 바지가 매출·영업이익을 견인하고 있다”고 했다.
기업의 주요 직급에 여성 인재가 등용되는 일이 늘면서 사무실 근무 복장도 격식을 갖춘 정장 형태로 바뀌는 추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여성 직장인의 옷차림은 대개 치마·블라우스였으나, 최근엔 재킷과 바지가 대세가 됐다. 패션 업체 LF의 브랜드 ‘질스튜어트 뉴욕 여성’은 직장 여성을 겨냥한 정장 재킷 비율을 늘리고 있다. 이 브랜드의 지난 8~11월 재킷 판매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가 증가했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의 여성 정장 브랜드 ‘르베이지’의 정장 라인 ‘르파인’의 올해 매출(11월 말 기준)도 작년 같은 기간보다 50% 이상 증가했다.
패션 업계는 여성 정장의 호황이 국내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 증가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글로벌 헤드헌팅 업체 유니코써치 조사에 따르면, 올해 국내 100대 대기업 여성 임원 수는 전년보다 13% 증가한 322명으로 집계됐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기업 가운데 여성 등기 임원이 1명 이상 있는 기업의 비율도 2019년엔 전체의 19%에 불과했지만 작년엔 30.6%, 올해는 55.9%로 늘어났다. 패션 업체 관계자는 “여성 임원들이 정장을 입으면, 그 아래 중간 간부급 여성들도 비슷한 정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기업뿐 아니라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도 여성 정장 수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예쁜 여자보다 센 여성”
여성 정장뿐 아니라 일반 여성복 시장에서도 성(性) 중립 스타일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30대를 겨냥한 의류를 판매하는 쇼핑몰 ‘탐 아카이브’는 작년까지만 해도 귀여운 외모의 여성을 주로 제품 모델로 기용했으나 올해 들어선 강렬하고 센 이미지의 여성으로 모델을 바꿨다. 이 업체 관계자는 “같은 옷도 강하고 센 여성이 입고 나올 때 매출이 더 높은 편이어서 모델을 교체했다”고 말했다.
힙합·스트리트 패션을 내놓으며 성(性) 중립 스타일을 강조하는 국내 패션 업체 ‘널디’는 올해 상반기 매출 33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11월까지 중국 면세점 매출도 전년 대비 5배 늘었다. 올해 안에 아시아·북미 시장 매출까지 합치면 매출 1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국내 1위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 따르면 올해 무신사에서 판매된 여성 조거팬츠·트레이닝 팬츠 판매량은 스커트 판매량보다 10배가량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