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충남 천안의 볼트·너트 생산 업체 신진화스너공업에서 열린 중소기업중앙회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중소기업인들은 중대재해법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부산의 한 부품표면처리 업체 대표는 “현장에서 위험하다고 스마트폰 보지 말라고 하면 직원이 다음 날 출근 안 해 버린다. 중기 인력난으로 일할 사람이 없으니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법에 치어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인은 “작은 기업에서 설비 보호 인력·안전 관리 인력으로 4명을 전환 배치하고 나니 현장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1월27일)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내 산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사고 발생 빈도가 높은 건설업계와 중대재해법 대응 여력 자체가 없는 중소기업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실정이다. 한 중소기업인은 “기업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만든 법 때문에 중소기업인들은 언제든 전과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할 경우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이다.
◇중소·건설업계 “혼란과 공포”
이날 기자회견에서 중기중앙회 노동인력위원회는 호소문을 통해 “중대재해법 처벌 수준은 세계 최고인데 누구도 법을 완벽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며 “대기업처럼 컨설팅도 받고 전문 인력도 채용하고 싶지만 코로나로 늘어난 대출금 때문에 현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다”고 했다. 지난해 말 중기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50인 이상 중소 제조업체 53.7%는 시행일 내에 법 준수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정한성 신진화스너공업 대표는 “근로자들이 편하게 일하고 싶어 안전 장치를 해제하고 일하다 사고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교통사고도 책임 소재를 따지는데 사업주가 안전 조치를 다 했는데도 발생한 사고를 사업주에게만 책임을 물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재해가 많은 건설 업계는 초비상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사고 670건 가운데 357건(53%)이 건설업에서 발생했다. 이에 따라 주요 건설업체들은 중대재해법이 실시되는 27일부터 설 연휴 기간까지 건설 현장 문을 아예 닫는다. 중대재해처벌 1호 기업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공기가 늦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근로자가 위험한 상황에서 작업 중단을 요청하는 작업 중지 요청권까지 도입하고 있지만, 건설 현장에서 사고 발생을 ‘0’으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안전 조직 무더기 신설
대기업들은 사내 안전 조직을 계속 늘리고 있다. 24일 현대자동차는 이동석 부사장을, 기아는 최준영 부사장(대표이사)을 각각 최고안전책임자(CSO)로 선임했다. 국내 생산 담당 책임자인 이들은 앞으로 각 사업장에 있는 안전 관리 조직을 총괄하고 안전사고 예방 업무에 주력할 계획이다. 지난해 8월 최고리스크담당책임자(CRO)를 신설한 LG전자는 최근 CRO 산하 안전 관리 조직인 안전환경담당을 안전환경그룹으로 격상했다. 포스코는 지난해 말 정기 인사에서 보건기획실을 신설했고, 현대제철도 지난해 사장 직속으로 안전보건총괄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대한항공은 최근 산업안전보건팀을 산업안전보건실로 격상했다. GS건설, 한화건설, 쌍용건설은 안전관리자를 두 자릿수 규모로 추가 채용하고 있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어느 수준까지 안전 조치 의무를 이행해야 기업들이 사고 책임에서 면제되는지를 중대재해처벌법이 명확히 밝히지 않으니까, 불안한 기업들이 임원 자리와 안전 조직만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중대재해법의 시행이 한국에 나가 있는 자국 기업에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4일 “한국 중대재해처벌법은 자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도 대상으로 한다”며 “안전사고 문제를 이유로 CEO 등 경영자를 처벌하는 법률은 세계적으로 드물다”면서 한국 내 미국이나 유럽 기업 등이 잇따라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