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한 한화그룹 신규 임원 인사 명단에서는 직급을 찾아볼 수 없다. 보통 기업이 발표하는 임원 인사에는 ‘상무 000’처럼 직급 뒤에 승진자 이름을 나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한화 인사에서는 직급 없이 승진자 이름만 적혀 있었다. 한화 관계자는 “연공서열을 없애고 직무 적합도나 능력에 따른 인사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신규 임원 승진자 명단만 발표했고 직급은 없앴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에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급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다. 최근엔 직원에서 임원으로 진입하는 첫 단계인 ‘상무’라는 직급명이 자취를 감췄고, 전무·부사장·사장 승진 인사 자체를 발표하지 않는 기업도 있다.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써치의 김혜양 대표는 “상명하복 문화의 상징이었던 직급을 없애고 직무 중심으로 인사 제도를 바꾸는 게 대세로 자리 잡았다”면서 “앞으로 더 빠르게 시대가 변하고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강조하는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이런 모습이 일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지는 임원 직급
올해 한화그룹은 ㈜한화·한화솔루션·한화건설과 같은 대부분 계열사에서 직급 없이 신규 임원 명단만 발표했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7월 임원 직급을 기존 5단계(상무보·상무·전무·부사장·사장)에서 4단계(상무·전무·부사장·사장)로 줄였는데 이제는 아예 임원 직급 자체를 없앴다. 회사 내부적으로 직책에 따라 연봉이나 대우를 다르게 적용하는 등급은 있지만, 기존의 상무·전무·부사장·사장과 같은 직급 체계는 사라진 것이다. 한화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제는 임원들을 실장·본부장·담당과 같은 직책으로 부른다”면서 “임원과 직원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고, 임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필요한 위계질서도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CJ그룹도 최근 발표한 임원 인사에서 한화처럼 신규 임원 승진자 명단만 내놨다. 기존 임원 중에서는 대표이사로 발탁된 임원들만 별도로 인사 명단을 발표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임원 직급을 통합해 ‘경영 리더’로 분류하고 있다. CJ 관계자는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이 상무에서, 전무·부사장을 거쳐야만 대표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제든 자신의 능력만 발휘하면 대표이사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라며 “근속 연수와 관계없이 업무 능력과 성과 중심으로만 인재를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2년 전 주요 계열사의 임원 직급을 없앤 DL그룹 또한 최근 인사에서 상무라는 직급을 빼고 신규 임원 명단만 발표했다. 앞서 SK그룹은 2019년부터 상무·전무·부사장을 부사장으로 통합했고, 삼성전자도 지난해 전무·부사장을 부사장으로 통합했다.
◇임원 인사 시기도 빨라져
임원 직급 파괴와 함께 대기업들의 인사 시기가 대폭 빨라지는 것도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엔 연말·연초에 정기 임원 인사를 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이제는 10~11월 임원 인사를 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화·CJ·DL뿐 아니라 신세계그룹도 27일 정기 임원 인사를 발표했다. LG그룹도 다음 달 정기 임원 인사를 발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이 이처럼 인사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연말·연초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10대 그룹 인사 담당자는 “연말은 한 해 사업을 정리하고 새해 사업 계획을 세워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데 임원들이 인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휴일도 많고 각종 송년 모임도 이어지는 연말이 오기 전에 임원 인사를 하면 조직이 흐트러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업무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임원 인사 이후 이어지는 조직 개편과 직원 인사를 해가 바뀌기 전에 마무리하고 새해에는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경기가 나빠진 것도 임원 인사를 앞당기는 이유로 분석된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는 “경기가 불황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임원 중에서 내보낼 사람을 빨리 정리하고 조직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면서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가운데 한발 앞서서 미래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