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최근 연말 정기 인사를 마무리한 주요 그룹의 트렌드는 ‘재무통’과 ‘감사 출신’의 약진이다. 기업은 인사(人事)로 말한다. 극심한 대내외 불확실성과 주력 사업의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주요 그룹들의 인사에선 ‘재무통’과 ‘감사통’의 전면 배치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재계 관계자는 “업황에 따라 사업 개발과 투자 전문가가 득세하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위기에는 재무와 감사 출신처럼 고삐를 바짝 죄는 인물에게 힘이 실린다”고 했다. 동시에 지주사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강화하며, 자회사 관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의지도 일제히 드러냈다.

그래픽=김의균

◇위기 속 재무, 감사 전면에

GS그룹의 지주사인 ㈜GS는 지난달 말 ‘재무통’ 홍순기 대표이사 사장의 부회장 승진을 발표하며 ‘믿을맨’이란 표현을 썼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을 그룹 유일의 부회장으로 내세우며 이같이 설명한 것이다. 홍 부회장은 CFO를 지내며 GS글로벌(2009년), GS E&R(2014년) 같은 굵직한 인수 합병을 비롯해 GS에너지 물적 분할(2012년) 등을 완수했다. GS는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어떤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그룹 전반의 내실을 더 견고히 하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CJ그룹 인사의 최대 화제 역시 ‘재무통’인 허인회 사장의 지주사 복귀였다. 추진력 강한 재무 전문가로 꼽히는 그는 ‘해결사’란 별명답게 CJ푸드빌, CJ오쇼핑, CJ CGV 등 경영난을 겪는 계열사에 투입돼 기업 재무, 실적을 개선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도 CGV의 6분기 연속 흑자를 이끈 뒤, 위기를 겪고 있는 지주사 CJ㈜의 경영지원대표로 선임됐다.

지주사뿐 아니라 핵심 계열사도 마찬가지였다. HD현대오일뱅크는 지난달 사장단 인사에서 지주사 재무지원실장인 송명준 부사장을 사장 승진과 함께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현장 전문가인 정임주 부사장과 함께 공동 대표 체제를 구축해, 부진에 빠진 실적 개선의 ‘구원투수’ 역할을 맡긴 것이다. SK그룹은 중간 지주사인 SK디스커버리 수장에 재무 출신인 손현호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사장을 내세웠고, HDC그룹도 ‘재무통’ 정경구 HDC 대표를 건설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감사 기능 강화도 두드러진다. 지난달 삼성이 ‘삼성 내 검찰’로 불렸던 경영진단실을 부활시키고, 미래전략실과 핵심 계열사 CEO 출신인 최윤호 사장을 배치해 그룹 사업을 제대로 들여다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 대표적이다. SK그룹은 ‘감사통’으로 유명한 신창호 부사장을 SK온에 신설한 운영총괄로 임명했다. 최근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에 그룹 내 감사 조직인 이른바 ‘자경단(자율책임 경영 지원단)’장 출신을 내세운 것이다. 이마트도 최근 조직 개편에서 감사팀을 대표이사 직속으로 전면 배치하며, 감사 기능에 힘을 실었다. 한 그룹 지주사 관계자는 “희망퇴직을 받기 전에 대대적인 감사를 벌인 다음, 결과지를 들고 구성원 면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지주사 고삐 죄기도 강화

위기 속 지주사의 ‘컨트롤 타워’ 역할도 일제히 강화됐다. 지주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각 자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며 효율성과 수익성의 고삐를 더 단단히 죄고 나선 것이다. 동시에 지주사 출신을 계열사 전면에 내세우며 직접 관리에 돌입했다.

LG는 최근 인사에서 그룹 경영관리 부문장을 신설하고, 지주사 경영전략 부문을 총괄하던 홍범식 사장을 계열사 대표로 내려보내며 그룹이 사활을 걸고 있는 인공지능(AI) 사업 강화란 ‘미션’을 부여했다.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롯데도 지주사의 노준형 경영혁신실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경영혁신실과 사업지원실을 통합해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역할을 강화했다. SK㈜도 조직 개편을 통해 포트폴리오 관리와 투자 기능을 기존 CFO 산하에서 CEO 직속으로 바꿔 대표이사가 직접 챙기도록 했다.

재계 관계자는 “한때 은막 뒤에 숨어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주사들이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자 그룹 경영 전면에 등장하며 위기 돌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