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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재계 2위 SK그룹의 지주사 SK㈜의 이사회는 김선희 매일유업 부회장을 의장으로 임명했다. SK그룹 지배 구조의 최상단에 있는 회사의 이사회를 다른 기업 최고경영자가 이끌도록 한 파격이었다. 지난 2021년 김 부회장이 SK㈜ 사외이사로 임명됐을 때도 화제였는데, 한발 더 나아가 이사회 의장까지 맡은 것이다. 현재 SK㈜의 사외이사 5명 중 가장 임기가 오래돼 SK그룹에 대한 이해가 깊고, 금융 전문가이자 경영자로서 경험도 풍부한 점 때문에 이사회에서 이견 없이 의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식품 기업 오뚜기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퀄컴의 장기건 수석부사장 겸 구매총괄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장 부사장은 퀄컴에서도 글로벌 공급망 전문가로 통했다. 최근 해외 진출에 적극적인 오뚜기가 공급망 구축 전략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이사회의 일원으로 ‘모셔온’ 셈이다.

그래픽=이진영

국내 대기업 이사회가 변화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사회는 한 기업의 전략 방향을 결정하는 일종의 ‘사령부’이자, 경영진의 임기나 보수를 정하며 견제를 하는 ‘감독관’이다. 기업의 핵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만큼, 미국 등 해외에서는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다른 회사 경영자를 자기 회사 이사회로 사실상 스카우트하는 사례가 이미 일반적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간 주요 기업 이사회는 교수나 관료, 법조인 일색이었다. 이사들이 실제 경영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사회를 ‘거수기’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기업 경영진에게 이사회 의장을 맡길 정도로 문호를 개방하는 사례까지 나오면서 ‘전문성’과 ‘독립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사회 독립성 높이고 전문성 얻고

지난 2017년 국내 대표 IT 기업인 네이버가 휴맥스그룹 창업주인 변대규 휴맥스홀딩스 회장을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했을 때만 해도 재계에선 ‘파격’이란 반응이 잇따랐다. 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동시에 다른 회사의 사외이사가 되거나 의장을 맡는 것이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이 2022년 당시 한국코닝 대표이사였던 이행희씨를 사외이사로 선임했거나, 2018년 삼성전자가 김종훈 키스위모바일 회장을 사외이사로 임명한 것이 많이 알려진 최근 사례였다. 2009년 손욱 당시 농심 회장이 현직 CEO로서 포스코 이사회 의장을 겸직한 것은 정말 드문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류가 달라졌다. 올해 주주총회에서는 김선희 매일유업 부회장과 장기건 퀄컴 수석부사장 사례 외에도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기업가나 재무 전문가로 이사회를 채우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국내 대표 IT 기업인 카카오의 경우 지난 26일 이사회 의장에 피에이치앤컴퍼니의 함춘승 사장을 임명했다. 2004~2013년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 대표이사를 지낸 투자 전문가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 25일 CJ제일제당 출신이자, 해외 판매·마케팅 경험이 많은 박찬주 DKSH퍼포먼스머터리얼코리아 대표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오는 28일 툴리스러쎌코터스코리아의 공성도 대표를 사외이사로 임명할 예정이다. 그는 BP코리아 사장, GE에너지 대표 등을 지낸 에너지 산업 분야 전문가다.

이미 해외에서는 전문성 갖춘 기업인을 이사로 임명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팀 쿡 애플 CEO는 나이키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엔비디아도 구글 계열사 캘리코의 아트 레빈슨 CEO를 사외이사로 임명했고, 휴 존스턴 디즈니 수석부사장도 MS(마이크로소프트)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지난 2012~2017년 당시 이탈리아 자동차 기업인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FCA)의 지주사 엑소르(Exor)의 사외이사로 활동한 적도 있다.

◇겸직 부담 넘어야 활성화 가능

이런 변화는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정보통신 기술의 확산 등 최근 기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 사이에서 역시 이사회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도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까진 경쟁 구도가 사실상 아예 없는 분야의 기업 경영진을 사외이사로 임명하거나, 경영보다는 금융·재무 전문가를 더 선호하는 성향이 더 뚜렷하다. 현재 기업 경영진이나 임원이 다른 회사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며 이사회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크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는 “전문성 있는 이사회가 곧 지배구조가 선진적인 기업이란 인식도 커지고 있고 투자자, 협력 파트너 등에게 끼치는 영향도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