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3월 4일 서해안의 고도 3만 피트(약 9144m) 상공을 전투기 KF-21의 시제기(試製機·성능 테스트용으로 만든 기체)가 날고 있었다. 한국이 약 8조9000억원을 투입해 세계 8번째로 독자 개발한 첫 국산 초음속 전투기로, 이날은 레이더를 장착해 진행된 첫 공식 테스트였다. 이 전투기 탄생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조종석 앞쪽에 장착된 능동위상배열(AESA) 레이더의 개발이었다. 초속 340m(시속 1224㎞)인 마하 1을 웃도는 속도인 초음속으로 비행할 때 발생하는 압력과 고온을 견디면서도, 여러 목표를 동시다발적으로 탐지해 100만분의 1초(1마이크로초) 단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이다. 미국, 이스라엘, 일본 등 세계 12국만 이 기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전투기의 눈‘이라고 불리는 이 레이더 국산화에 성공하며, 한국형 전투기를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본격 양산에 들어간 이 전투기는 내년 부대에 배치된다.
이날 테스트의 핵심은 3만 피트 상공에서 레이더가 200㎞ 밖 어딘가에 있는 표적기를 제대로 포착하느냐를 검증하는 것이었다. 파일럿이 레이더 작동 테스트를 시작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홍윤석(54) 당시 한화시스템 레이더연구소장 등 개발진은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더 작동 버튼이 눌러졌다. 1초도 지나지 않아 개발진이 보던 화면에 상대 비행기를 감지했다는 표시가 떴다.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건 찰나였지만,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한화시스템 100여 명 개발진이 여기까지 오는 데 7년이 걸렸다.
홍윤석 한화시스템 레이더연구소장은 AESA 기술 약 90%를 국산화한 주역 중 하나다. 특히 그는 2002년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 입사 이후 지금까지 약 23년간 레이더 외길을 걸었다. 폭발적으로 이동통신이 발달하던 시기, 이동통신 핵심 장비를 만들던 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의 트렌드보다 장기적으로 자기가 성장시킬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었다. 그러다 지인을 통해 통신 기술을 활용하는 레이더 분야에 뛰어들게 됐다. AESA 레이더 외에도 미사일 방공 시스템인 천궁II, 작년 말 국산화가 끝난 장거리 지대공 유도 무기, ‘한국판 아이언돔‘으로 불리는, 장사정포 요격 체계 등에 쓰이는 레이더 개발에 그간 참여해왔다.
◇코로나 뚫고 3만 피트 공중 테스트
레이더(radar)는 전파가 표적을 맞고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목표의 위치와 거리를 탐지하는 장비다. 보통 레이더는 직진하는 전파를 여러 방향으로 쏘기 위해 전파를 발사하는 안테나 장치가 360도 회전한다. 하지만 AESA 레이더는 전파를 쏘는 특수 소형 장비(모듈) 1000여 개를 안테나에 설치해, 안테나를 회전시키지 않고도 모듈별로 전파를 원하는 방향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더 넓은 범위로 보낼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다.
AESA 기술의 국산화는 2015년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개발 추진과 더불어 시작됐다. 정부는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를 수입하는 대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미 록히드마틴의 핵심 기술을 이전받아 독자 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AESA 레이더 기술 이전은 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2016년 3600억원을 투입한 독자 개발이 시작됐다.
홍 소장은 “우리 방산도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쌓은 레이더 기술이 결코 호락호락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전투기용 레이더는 처음이었다”면서 “그래서 외부에선 이런 고난도 기술은 국산화가 어려우니 수입하자는 비관론이 많았다”고 했다. 특히 레이더가 전투기에 실리다 보니 고정되지 않고 초음속으로 움직이는 상태에서도 전파를 쏴야 했고, 지상에서 공중을 살피는 일반 레이더와는 달리, 공중·지상·해상을 모두 살펴야 하는 것 등이 모두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개발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3만 피트 안팎 상공에서도 레이더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여부였다.
기초 개발이 끝난 2020년 테스트를 하려 했지만 난관이 많았다. 레이더를 테스트하려면 시험 항공기에 레이더를 설치한 후 시험용 장비를 싣는 등 개조를 해야 하는데, 개조한 비행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감항(堪航) 인증‘을 정부에서 받아야 했다. 하지만 레이더를 실제 비행기로 테스트하는 일이 국내에서 처음이라 감항 인증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남아공까지 날아가야 했다. 홍 소장은 “이탈리아 방산 업체 레오나르도에 의뢰해 감항 인증을 빨리 내줄 수 있는 나라를 물색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고 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코로나 사태가 시작됐다. 남아공으로 향한 수십 명 연구원이 마스크를 2~3개씩 겹쳐 쓴 채로 각종 테스트를 하며 감염 공포에 시달렸다.
◇내년 KF-21 배치 앞두고 생산 시작
이런 상황 속에서도 AESA 레이더는 최근까지 국내외에서 200회 이상 공중 테스트를 거쳐 성능을 검증받았다. 작년 5월 방위사업청으로부터 ‘잠정 전투용 적합’ 판정을 받았고, 작년 6월 방위사업청과 양산 계약을 맺고 7월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내년 본격 배치를 앞둔 KF-21에 탑재될 예정이다.
해외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작년 5월 이탈리아 방산 기업 레오나르도에 한화시스템이 핵심 부품인 ‘경공격기 AESA 레이더 안테나‘를 수출하게 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또 한화시스템과 작년부터 더 최신 기술인 ‘공랭식’ AESA 레이더를 해외에 판매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은 냉각수로 열기를 잡는데, 공기로 냉각시키면 냉각 장치가 필요 없어져 레이더를 소형·경량화할 수 있어 한발 앞선 기술로 꼽힌다. 홍 소장은 “AESA 레이더의 성공은 결국 구축함이나 잠수함 등 다양한 무기들로 확산해 적용할 수 있다는 경쟁력이 있다”면서 “향후 드론에 실을 수 있는 AESA 레이더 개발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