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자회사인 ‘켐코‘와 LG화학이 합작해 만든 한국전구체(KPC)의 울산 울주군 공장. 국가첨단전략기술로 지정된 ‘하이니켈 전구체 기술‘을 바탕으로 올 초부터 이차전지 핵심 소재인 전구체를 양산하고 있다. 전구체는 현재 중국 기업이 전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고려아연

2023년 12월 7일, 고려아연은 서울 여의도에서 ‘인베스터 데이(투자자의 날)’ 행사를 열고 향후 10년의 미래 비전과 성장 전략을 발표했다. 1974년 창사 이래 첫 IR(기업 설명회)이었다. 이 자리에서 회사는 “50년간 축적된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의 역량을 활용해 이차전지 소재 등 미래 사업에 향후 10년간 11조9000억원을 투자하고, 연평균 10% 성장률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0년 계획’의 원년이었던 2024년, 이 회사는 사모 펀드 MBK발(發) 경영권 분쟁으로 휘청거렸다. 지난해 9월부터 8개월째 이어진 경영권 공방에서 양측은 조(兆) 단위 자금을 투입하는 ‘머니 게임‘을 벌였고, 주가는 요동쳤다. 주요 생산 품목인 희귀 광물, 이차전지 전구체 등은 한때 고려아연을 탈중국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부각시켰지만, 아직 회사는 올해 사업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전쟁‘과 그에 따른 공급망 재편의 수혜를 받을 것이란 기대도 나오지만, 지난 8개월과 같은 날이 앞으로도 반복되면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양측이 수조 원을 들여 싸우면서 크고 작은 상처가 쌓였다”며 “누가 승자가 되든 회사에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양측 조 단위 빚… 이자 비용 2배 급증

작년 9월 시작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양측이 투입한 돈은 3조원을 웃돈다. 고려아연 측은 자사주 매입 등을 위해 연 6.5% 고금리에 1조원을 빌렸고, 이를 갚기 위해 최근 15년 만에 회사채(약 7000억원) 공모에 나섰다. 기업이 자금 조달을 위해 회사채 발행에 나서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년 4분기에 ‘100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한 ‘알짜 기업’ 고려아연에선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 전(작년 6월 말) 36.5%였던 부채 비율이 작년 말 94.8%로 가파르게 늘었다. 연간 이자 비용도 2023년 423억원에서 작년 1179억원으로 급증했다. 고려아연 이사회와 노조가 합심해 경영권 방어에 나서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회사의 재무 구조가 부실화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지적도 나온다.

MBK 역시 고려아연 지분 확보를 위해 대출을 동원했다. 약 1조6000억원을 경영권 분쟁에 투입하면서 그중 4분의 3인 1조2000억원가량을 증권사 담보 대출로 마련했다. 이른바 ‘기습 회생 절차‘에 돌입한 홈플러스 인수 때처럼 차입 매수(LBO) 방식이라는 점도 논란이 됐다. MBK는 홈플러스 인수 뒤 상환 부담이 커지자 알짜 점포를 잇따라 매각했는데,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할 경우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커진 것이다.

재무 구조 악화는 전통 제련 기업에서 이차전지 소재, 재생에너지 등으로 변신에 나선 고려아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고려아연은 중국이 사실상 독점하는 핵심 광물 안티모니, 인듐과 이차전지 소재 전구체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으로 꼽힌다. 그러나 정작 지난해 신사업은 지지부진했고 경영권 분쟁에만 조 단위 돈을 썼다.

◇재계는 사모 펀드의 산업 자본 인수 이어질라 촉각

지난달 28일 고려아연 주주총회에서 현 경영진인 최윤범 회장 측은 이사회 15명 중 11명을 확보하며 일단 경영권을 방어했다. 하지만 MBK 측이 “주주총회는 무효”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면서 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MBK 측은 지난 주주총회 때 MBK·영풍 측의 의결권(약 25%)을 봉쇄하는 데 사용된 ‘상호주 제한‘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에 항고했다. 최 회장 측은 MBK 쪽이 제기하는 다른 민형사 소송에도 대응해야 한다. 중요한 사업 의사 결정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재계에선 고려아연의 경우처럼 금융 자본이 수조 원의 자금을 손쉽게 동원해 언제든 적대적 기업 인수에 나설 수 있고, 우량 기업마저 이를 방어하다 휘청거릴 수 있다고 본다. 사모 펀드 특성상 국가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업이 해외 자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비공개 방식으로 자금을 모집하는 사모 펀드는 주주, 투자자 구성, 매출 구조가 불투명하다는 게 특징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