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반도체 제조의 마지막 단계인 ‘후(後)공정’에 초점을 맞춰 다시 한번 반도체 왕국으로 부활한다는 계획을 가다듬고 있다.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파운드리(위탁 생산) 같은 반도체 전(前)공정에선 한국·대만에 참패했지만, 여러 반도체를 하나로 묶어 부품으로 만드는 후공정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정부와 민간 기업이 힘을 합쳐 격차를 더 벌린다는 것이다. 앞으로 3~4년 내 반도체의 초미세화가 한계에 부딪힐 경우 반도체 전공정 못지않게 후공정이 중요한 기술로 대두될 수 있기에 이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27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후공정에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기술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며 “반도체 관련 소재를 포함해 후공정은 일본이 반도체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분야”라고 보도했다. 통상 반도체라고 말할 때는 반도체 전공정을 일컫는다. D램 같은 반도체는 물론이고 로직칩(시스템 반도체)을 생산하는 파운드리는 모두 전공정이다. 지름 30㎝ 둥근 판 위에 5㎚(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의 가는 회로를 그려 넣은 뒤, 원판을 잘라서 반도체를 만든다. 후공정은 이렇게 만든 반도체를 기판 위에 배치해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 스마트폰이나 PC, 서버(대형 컴퓨터) 등 각 제품에 쓸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공정에서는 일본의 이비덴·신코·레조나크·아지노모토 같은 세계 톱 수준의 기업들이 아직 건재하다. 첨단 기판 분야의 세계 1·2위는 일본 이비덴과 신코다. 낮은 기술의 값싼 기판은 중국 제조사 수십곳이 모두 잠식했지만, 서버용 최첨단 기판은 두 회사가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단순히 반도체 한 개를 후공정으로 포장하는 건 간단해 중국산도 가능하다. 이비덴은 복수의 반도체를 옆으로는 물론이고 위로도 20층 이상을 쌓아 하나의 부품을 만든다. 쌓을수록 연산 처리량은 커진다. 복수의 반도체를 입체적으로 연결, 3차원화해 처리 능력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 가장 최고 품질의 서버용 후공정은 20층 이상을 요구하는데 두 회사가 가장 경쟁력이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정부·기업 연합작전 후공정에 집중… “일본이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분야”

일본 레조나크홀딩스는 후공정에 쓰이는 반도체 재료 분야의 세계 1위다. 레조나크는 석유화학이 주력이지만 반도체 소재 기업 쇼와덴코를 통합하고 집중 투자를 선언했다. 레조나크는 5년간 반도체 소재에 2500억엔(약 2조4200억원) 이상을 투자해 2030년엔 이 분야에서만 8500억엔(약 8조25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흔히 조미료 회사로 알려진 일본 아지노모토는 기판에서 반도체를 위로 쌓아 올릴 때 쓰이는 필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층 쌓을 때마다 중간에 ABF(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을 끼워넣는데 아직 대체재가 없다. 일본 어드밴스트와 후지필름은 각각 반도체 검사 장비와 후공정용 연마제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도쿄대, 도호쿠대, 오사카대 등 대학들은 일본 메모리 반도체 왕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후공정 연구를 지속했다. 일본에는 산학 협력 후공정 컨소시엄만 4~5곳이 존재한다. 일본 정부도 레조나크 등 12사가 2년 전 공동 설립한 ‘조인트2′에 50억엔(약 480억원)을 지원하며 후공정 왕국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본이 강한 반도체 후공정은 지금까지 반도체 기술 전쟁에서 논외로 취급됐다. 반도체 전공정에서 회로 선폭을 20㎚에서 10㎚로, 다시 5㎚로 줄이는 혁신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나 TSMC의 회선 폭 혁신 로드맵에 2㎚까지 등장하면서 회선 폭 줄이기 혁신은 점차 한계에 근접하고 있다. 1~2년 전부터는 고성능 서버에선 반도체 못지않게 후공정에서 대면적·다층화로 묶은 부품이 연산 능력을 극대화하는 경쟁력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등장할 차세대 통신 기술 ‘6G’나 자율주행차에는 고성능 서버 수준의 반도체 부품이 필요해 후공정이 재평가받는 상황이다.

후공정의 진입 장벽도 높은 편이다. 후공정의 반도체 쌓기는 높아질수록 찌그러질 가능성이 커져, 수율(정상 제품 비율)을 높이기 쉽지 않다. 작년 삼성전기는 외부 비공개로 후공정서 20층 이상 쌓기에 성공했는데 수율이 30% 안팎이라서 고민한다는 말도 나온다. 삼성전자도 최고 기술력의 일본 후공정 주요 기업, 주요 대학과 협력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이달 17일 충남에 있는 천안·온양 캠퍼스의 반도체 후공정 라인을 방문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공정·후공정

반도체를 설계하고 동그란 원판인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겨 잘라내는 과정까지를 전(前)공정이라고 한다. D램과 같은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이고 로직 칩(logic chip·시스템 반도체)을 생산하는 파운드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후 반도체를 IT 기기 등 전자제품에 최종 탑재할 때까지 거치는 테스트(test)와 패키징(packaging·조립) 과정을 후(後)공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