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친환경 배터리와 재생 에너지 등 녹색 산업 기업에 미국과 중국 등 경쟁국과 동일한 수준의 보조금을 약속하는 강력한 지원책을 발표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녹색 산업 기업에 막대한 세제 혜택을 주기로 함에 따라 유럽 친환경 기업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막는 한편, 자국 기업에 노골적으로 정부 자금을 투자하는 중국도 견제하는 것이다. 글로벌 기후변화에 대응한 ‘탈탄소 경제’가 대세가 된 상황에서,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1일(현지시간) 벨기에 브위셀에서 EU의 '그린딜 산업계획'(Green Deal Industrial Plan)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린딜 산업계획은 친환경 산업에 투자 및 혜택을 집중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맞서 역내 산업 보호 및 투자 육성;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23.02.02/로이터 연합뉴스

EU 집행위원회는 9일(현지 시각) 2025년 말까지 역내 녹색 산업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관련 규정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워크’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신종 코로나 등 경제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유럽 기업을 도우려 운영해 온 기존 ‘한시적 위기 프레임 워크’를 수정·확대한 것으로, 전기차용 배터리와 태양광·풍력발전, 탄소 포집 및 활용 기술 분야 등 기업을 위한 원활한 자금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EU 집행위는 이들 기업이 외국에서 받을 수 있는 보조금과 동일한 금액을 지원하는 ‘매칭 보조금 제도’도 전격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중국의 보조금 정책에 맞선 유럽의 녹색 산업 보호 대책으로 풀이된다. 로이터와 파이낸셜타임스 등 유럽 언론은 “친환경·탈(脫)탄소 기술 기업이 더 많은 산업 지원 혜택을 받으려 공장이나 연구시설을 유럽 밖으로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 자금으로 급성장한 중국의 녹색 산업에 맞서겠다는 의미도 있다”고 분석했다.

EU의 녹색 산업 보조금 강화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밝힌 ‘그린딜(Green Deal) 산업 계획’의 3대 축(軸) 중 하나다. EU는 오는 14일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원자재법’의 초안도 공개한다. 탄소중립산업법은 녹색 산업 기업이 유럽에 투자하면 각종 인허가를 신속하게 내주는 등 여러 혜택을 주는 내용이다. 핵심원자재법은 배터리와 재생 에너지 설비에 들어가는 리튬·코발트·니켈과 희토류의 특정 국가(중국) 의존을 줄이는 것이 목표다.

EU는 지난해 8월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발표한 이후 녹색 산업 진흥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정부는 IRA를 통해 에너지 안보 및 기후변화 대응 등에 총 3690억달러(약 488조원)의 정부 예산을 투자한다. 녹색 산업 분야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면 세금 감면과 제품에 적용되는 친환경 보조금 등을 통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자 전기차 업체를 포함한 전 세계 녹색 산업 기업들이 미국으로 생산 시설을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면 EU는 IRA가 해외 녹색 산업 기업을 차별하고 이들을 미국으로 끌어가려 한다고 보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수도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실제 독일 폴크스바겐은 동유럽에 지을 계획이었던 배터리 공장을 보류하고 대신 북미 공장을 추진 중이다. 미국에서 보조금과 대출 지원금을 합쳐 100억유로(약 14조원)를 조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산업계에선 “유럽의 배터리·태양광 시장을 공략하는 한국 기업들도 보조금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태양광 패널 업체 한화솔루션은 지금까지 유럽에 공장을 두지 않고 말레이시아에서 만든 패널을 수출해 왔지만, EU의 보조금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현지 공장 건립이 수월해질 전망이다. 또 LG에너지솔루션이 폴란드에, 삼성SDI와 SK온이 헝가리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운영 중으로, 이들 기업은 향후 전기차 시장 확대로 신규 공장을 증설할 때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유럽이 역내 투자를 늘리기 위한 보조금 정책을 강화하면서 국내 투자는 더 위축될 우려가 커졌다. 지난해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서 3만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한국이 일자리 기여도가 가장 높은 해외 국가로 기록됐다. 미국 제조업 부흥과 한미 금리 역전으로 달러 가치가 급등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부담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이 경쟁적으로 투자 유인책을 쏟아내는데, 한국은 반도체특별법조차 통과가 안 되고 있다”며 “무역 적자를 해결하려면 국내 투자 유인책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EU가 양보 없는 보조금 전쟁을 벌이는 바탕에는 미래 산업 주도권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의지가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녹색 기술 시장 규모는 2021년 355억달러(약 47조원)에서 2030년 4174억달러(약 553조원)가 돼 9년 만에 12배가량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혁명 이후 260여 년간 이어온 석탄·석유 등 탄소 에너지 인프라가 재생 에너지를 이용한 전기 기반으로 바뀌면서, 전환이 느린 기존 기업은 완전 도태될 수 있는 큰 변화가 예상된다. 모두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최상위권에 포진한 분야다.

EU는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한발 앞서 키워 온 유럽의 녹색 산업이, 더 큰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미·중에 추월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과 EU는 우주·항공 산업 분야의 주도권을 놓고도 보조금 전쟁을 벌인 바 있다. 미국은 보잉에, EU는 에어버스에 각각 수십억달러(수조원)에 달하는 보조금 지원을 했다. 양측은 “상대편이 먼저 불법 보조금을 제공했다”며 WTO에 제소까지 했다. 그 결과 미국은 2019년 EU산 상품 75억달러어치에, EU는 2020년 미국산 상품 40억달러어치에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