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채무불이행(디폴트)으로 중국 부동산 위기의 진원이 됐던 대형 부동산 개발 업체 헝다(恒大)그룹이 미국 법원에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블룸버그통신은 17일(현지 시각) “헝다와 금융 부문 계열사인 톈지(天基)·징청(景程)이 함께 뉴욕 법원에 챕터 15(연방 파산법 제15장)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고 전했다.
헝다의 파산 신청과 미국의 10년물 국채 금리가 연 4.3%를 넘어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에 18일 아시아 증시는 일제히 하락했다.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1% 떨어졌고, 한국 코스피와 일본 닛케이평균도 각각 0.61%, 0.55% 하락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 상하이·선전 증시에서 외국인들은 17일까지 9일 연속 순매도(매도가 매수보다 많은 것)했다. 2016년 12월 이후 6년 9개월 만에 최장 순매도 기록이다. 헝다그룹 주식 거래는 홍콩 증시에서 작년 3월 21일부터 정지된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부동산 개발 업체들의 디폴트 위기에 이어 이 회사들에 대거 투자한 신탁회사들도 유동성 부족 때문에 예탁금 지급을 연기하고 있다”며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전했다.
◇“헝다 파산 신청은 해외 채무 탕감 의도”
헝다는 2021년 디폴트에 빠진 뒤 채무 구조 조정을 위해 거의 2년간 채권단과 협상을 벌여왔다. 작년 말 기준 헝다의 부채는 3400억달러(약 455조원)로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에 달한다.
이번 파산 신청은 헝다가 해외 채권자들에게 채무를 변제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챕터 15′는 한국의 ‘채무자 회생법(국제 도산)’에 해당한다. 외국계 기업이 회생을 추진할 때 미국 내 채권자들의 채무 변제 요구와 소송에서 기업을 보호하는 규정이다. WSJ는 “190억달러에 달하는 헝다의 해외 채권 대부분은 미국법을 적용받는다”고 전했다.
헝다는 아직 중국에서는 파산 보호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전대규 파산법 전문 변호사는 “중국에서 파산 신청을 하면 법원이 수리 결정(한국의 개시 결정)을 해야 채권자의 권리 행사가 제한되는 반면, 미국은 신청하면 바로 권리 행사가 제한된다”며 “채권자와 협상도 즉각 가능해진다”고 했다.
헝다는 “해외 채권단에 새로운 채무 구조 조정안을 고려할 시간을 준다”는 구실로 지난달 예정된 채무 조정 회의를 이달 말로 연기했다. 회의에서는 32억달러(약 4조2800억원) 규모 부채 구조 조정안이 다뤄질 전망이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 신흥경제부장은 “헝다가 중국 내 채무를 구조 조정 하면서 해외 채무는 탕감받으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위기 경고 속에 낙관론도 나와
헝다·완다(萬達)·비구이위안(碧桂園)·위안양(遠洋) 등 부동산 업체들의 도미노 디폴트는 11조4209억달러(약 1경5300억조원)로 추산되는 중국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으로 번질 수 있다. 그림자 금융이란 은행이 아닌 헤지펀드·사모펀드·특수 목적 법인 등의 금융회사들이 취급하는 자금으로,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이나 예금자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위기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 레이 달리오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이 대규모 부채 구조 조정 시기를 놓쳤다”며 “특히 재정적으로 빈곤한 일부 지방정부가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부동산 위기가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중국 정부가 국유화나 구제금융을 통해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KB증권은 “중국 부동산 개발 업자들의 채무는 위안화로 발행한 규모가 큰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확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중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될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