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오전 신세계가 운영하는 운동화 전문 편집매장 ‘케이스스터디’의 온라인 몰이 갑자기 마비됐다. 이날 사이트에선 오전 11시부터 운동화 브랜드 ‘반스’의 한정판 제품을 선착순 판매할 예정이었다. 운동화 마니아들은 ’11시00분00초'에 맞춰 물건을 낚아채기 위해, 컴퓨터·모바일 앞에서 ‘광클(광적인 클릭)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판매 시간 10여분이 지나도록 물건은 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11분쯤 화면에 상품이 등장했을 땐 이미 ‘품절’ 표시가 함께 떠 있는 상태였다.

최근 운동화 편집숍 케이스스터디가 온라인 선착순 판매 행사에서 상품을 사재기하는 매크로 프로그램 '스니커 봇'의 공격을 받았다. 자동 입력 반복 작업을 수행하는 매크로 프로그램은 국내에서는 지난 2018년 불거진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드루킹 김동원(오른쪽)씨는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기사 댓글을 조작하고, 김경수(왼쪽) 경남지사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 한모씨에게 뇌물 500만원을 준 혐의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지난해 1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던 김 지사의 항소심 결과는 오는 11월 나올 예정이다. /뉴시스·조선일보DB·나이키

아침부터 헛수고를 한 일부 소비자들은 격앙했다. 운동화 정보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선 “업체가 지인·인플루언서에게 물건을 사전에 빼돌리는 ‘백도어(뒷문)’ 판매를 한 것 같다”며 ‘음모론’까지 퍼졌다.

소비자 불만이 쏟아지자 케이스스터디 측이 진상 파악에 나섰다. 조사 결과, 이날 쇼핑몰은 ‘스니커 봇(bot)’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스니커 봇은 로그인·구매 작업을 클릭 한 번으로 무한 반복해 운동화를 사재기하는 일종의 ‘매크로 프로그램’이다.

2019년 12월 20만9000원에 출시돼 2020년 10월 현재 90만원대에 재판매 되고 있는 '나이키X오프 화이트 덩크 로우 파인 그린'. /나이키·일러스트=안병현

자동 입력 반복 업무를 수행하는 ‘매크로’는 지난 2018년 드루킹 여론 조작 사건 당시, 기사 댓글에 공감·비공감을 허위로 반복 입력하는 ‘킹크랩’ 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결국 케이스스터디는 매크로 공격으로 80여켤레의 운동화를 구입한 이들에 대해 회원 자격을 영구 박탈하고, 제품을 추첨 방식으로 다시 판매했다.

지난달 12일 신세계 분더샵의 운동화 전문 편집 매장 '케이스스터디'가 한정 판매한 '반스X루드' 운동화. 이날 케이스스터디 온라인 몰은 스니커 봇의 공격을 받았다. /케이스스터디

◇슈테크 광풍

아이돌 콘서트·뮤지컬 공연 티켓 시장에서 기승을 부리던 사재기 봇이 운동화 유통 시장까지 덮치고 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정판 운동화 인기가 치솟고, 리셀(resell·재판매) 시장도 덩달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먼저 등장한 스니커 봇은 국내에서 사용할 경우, 업무 방해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불법 프로그램이다.

한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 개발자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돈이 몰리는 영역마다 불법 사재기, 검색어 조작 등 온갖 ‘어뷰징(abusing)’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며 “사이트 관리자는 모든 방문 트래픽에 어뷰징이 발생한다는 가정 하에 부정 행위를 걸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옥션블루가 운영하는 리셀 플랫폼 '엑스엑스블루'의 서울 신사동 오프라인 매장. /XXBLUE

운동화 리셀 시장은 지난 1~2년새 ‘광풍’을 일으키며 성장하고 있다. 국내에선 지난해부터 서울옥션, 온라인 패션몰 무신사, 네이버, 롯데백화점, KT가 운동화 재판매업에 뛰어들었다. 한정판 운동화를 구입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리셀 플랫폼에서 많게는 수십배에 달하는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슈테크'(신발+재테크)족도 크게 늘었다.

급기야 암시장까지 생겨나고 있다. 지난달 18일 서울 한남동의 운동화 편집숍 앞에는 이날 한정 발매된 ‘카시나Ⅹ나이키 덩크 로우’ 운동화(12만9000원)를 120만~130만원에 현금 구입하려는 중국인 업자들이 여러명 나타났다. 중국 역시 투기성 운동화 매매를 뜻하는 ‘차오셰(炒鞋)’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슈테크 열풍이 거세다. 매장 앞에서 발매 전날부터 밤새도록 줄을 서주는 ‘구매 대행·줄 서기 알바’도 있다.

지난달 18일 발매된 12만9000원짜리 '카시나Ⅹ나이키 덩크' 운동화는 발매 당일 리셀 플랫폼에서 120만원대에 재판매됐다. /네이버 스노우 '크림'

나이키·아디다스 등은 ‘진정한 애호가를 가려내겠다’며 판매 당일 ‘복장 지침’을 내리고, 특정 운동화·의류를 착용한 사람에게만 물건을 팔기도 한다. 한 운동화 편집숍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가수 GD와 나이키가 협업한 ‘에어 포스1 파라-노이즈’ 운동화를 계기로 국내 운동화 리셀 거래가 폭발했다"며 “이후 암암리에 존재하던 스니커 봇, 줄서기 알바, 암시장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투명하고 안전한 리셀 플랫폼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