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주점 체인 ‘오늘, 와인 한잔’은 최근 전국 112개 지점 주방에서 칼을 안 쓰는 실험을 하고 있다. 채소나 고기를 사서 직접 칼질하는 대신 식자재 업체가 미리 자르고 다져 손질해 놓은 새우, 떡, 마늘, 스테이크 등을 받아 조리하는 것이다. 직원들은 새벽같이 매장에 나와 칼·도마와 씨름할 필요 없이 잘 정리된 채 배달 온 재료를 조리해 정갈히 담아 옮기면 업무가 끝난다. 메뉴의 60~70% 정도가 재료를 직접 손질할 필요 없이 안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업체 관계자는 “인건비를 아끼면서 업무 효율을 높이고 맛의 일관성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방에서 칼을 없애고 미리 준비된 식재료를 조리만 하는 외식 업체들이 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서도 요식 업체가 가공되지 않은 육류와 곡류, 수산물을 구입하는 비율이 2019년 전체 식재료의 74.4%에서 2021년 57.7%로 줄어든 반면 전(前)처리, 가공 식재료 비율은 25.6%에서 42.3%로 늘었다. 채소·과일류도 전처리, 가공 비율이 2년 사이 32.4%에서 51.5%로 뛰었다.
◇인력난, 효율화에 사라진 주방 칼
식당들이 직접 손질을 줄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인력난이다. 특히 칼질을 잘할 수 있는 주방 전문 이력자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닭갈비 체인 일도씨 닭갈비도 작년부터 광화문점 등 일부 지점에서 재료 손질 없이 조리만 하도록 하고 있다. 대신 서울 근교 자체 처리장에서 닭, 대파, 양파, 고구마 등 식자재를 다듬어 매일 아침 각 지점으로 보내준다. 김일도 대표는 “주방 직원은 시급을 20% 더 준다고 해도 구하기 힘들다”며 “그렇다고 일반 직원들에게 칼질을 맡겼다가는 사고 위험도 있어 아예 칼 사용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식당에선 “그래도 직접 다듬은 재료를 써야 한다”며 대안으로 숙련된 ‘주방 이모’ 등을 임시직 일당제로 고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당제 직원들은 장기간 근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문제라고 한다. 직원이 바뀔 때마다 음식 재료 크기나 모양이 바뀌기 때문이다. 수도권 한 쌀국수 가게 주인은 “양파 하나를 써도 일정한 크기로 공급받는 게 편해 식자재 업체에 맡기고 있다”고 했다.
업계에선 현재 40조~50조원으로 추산되는 식자재 유통 시장에서 전처리 시장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식자재유통협회 관계자는 “아직 전처리, 반조리 식자재의 유통 체계가 시스템화돼 있지 않지만 규모의 경제만 갖춰지면 식자재 유통 시장에서도 중요한 분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팽창 조짐에 대기업도 뛰기 시작
외식 업자나 영세 업자들이 식자재를 받아 쓰는 일이 늘면서 학교나 군대, 병원 등 대규모 급식처를 주로 취급했던 대기업도 전처리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 가정 간편식 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간편식이나 밀키트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해 외식업 공략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인천의 한 마라탕집은 꿔바로우 요리용 돼지고기를 현대그린푸드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냉장 돼지 고기가 얇게 썰린 상태로 배달돼 재료 준비 시간을 크게 줄였다. 경기 용인의 한 쌀국수 집도 같은 업체로부터 매월 1.8t의 슬라이스 양파를 공급받고 있다.
식자재 유통 분야에서 가장 규모가 큰 CJ프레시웨이도 최근 중소 규모 외식 업계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늘려가고 있다. 체인점이 20개밖에 안 되는 영세 프랜차이즈부터 100여 개 지점을 운영하는 돈까스 집까지 상대한다. 최근엔 아예 직접 외식 업체 메뉴를 컨설팅해주며 원팩(완전 조리된 음식) 상품을 공급하기도 한다. 식자재 마트를 운영하는 대상은 시장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작년 온라인 몰 ‘베스트온’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