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만 해도 10만원 아래였던 것 같은데….”
회사원 박모(37)씨는 최근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 12년산 더블우드’(700mL) 제품을 사려다가 흠칫 놀랐다. 가성비가 좋아 대표적인 ‘입문용 위스키’로 꼽히는데, 한 주류 전문점에서 15만원에 팔리고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8만원대에 구입하던 술이었다. 박씨는 “위스키 값이 말 그대로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면서 “’위스키는 오늘 가격이 가장 싸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위스키 가격이 최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위스키는 2010년대 들어 유흥 주점 소비가 줄면서 소비량이 확 감소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위스키가 혼술족(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 등 젊은 세대에서 ‘힙한(멋져 보이는) 주류’로 인식되는 등 전체적인 소비가 늘자,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독 한국에서만 위스키 값이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점이다. 코로나 이후 해외에서도 위스키 수요가 늘면서 가격도 비슷하게 오른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알고 보니 국내외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발베니 12년산의 경우 각국 주류 전문점 기준으로 한국 가격은 영국 런던(7만3000원)뿐 아니라, 이를 수입하는 일본 도쿄(8만5000원), 미국 뉴욕(8만7000원) 제품과 비교해도 많게는 2배 정도 된다. 발렌타인 17년산 등 다른 위스키도 대부분 그렇다. 더구나 위스키 값이 왜 이렇게 비싼지, 그간의 인상 폭은 적절했는지 소비자들은 알 길이 없다. ‘깜깜이 인상’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왜 오르나, 소비자는 알 길이 없다
국내 수입사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수요 증가를 이유로 주거니 받거니 가격 인상을 계속하고 있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지난해 조니워커 등 제품의 공급가를 두 번, 최대 20% 올렸다. 페르노리카코리아도 역시 지난해에만 두 차례 가격 인상을 해 발렌타인 17년산 공급가가 11만5000원에서 13만1000원으로 13.9% 뛰었다. 디앤피 스피리츠의 하이랜드파크 21년산 공급가는 33만원에서 50% 올라 올해 49만5000원이 됐다.
수입 위스키는 보통 ①해외 제조사(본사) ②한국 수입사 ③도매상 ④소매 업체(식당, 호텔, 유흥 주점, 주류 전문점) 순으로 국내에 유통된다. 예를 들어 수입사가 공급가를 20만원(주세·관세 등 포함)으로 정해 도매상에 넘기면, 도매상은 약 20%의 마진을 붙여 주류 전문점이나 주점 등 소매 업체에 납품한다. 주류 전문점은 대략 여기에 30~50% 이윤을 붙여 소비자들에게 판매한다. 위스키바나 호텔 등 주점은 도매상 가격의 2~3배를 받고 내놓는다. 이런 다단계 유통 구조를 거치면서, 수입사가 가격을 4만원 올리면, 주류 전문점에선 7만원 이상, 고급 주점에선 14만원 이상 인상되는 것이다.
수입사 측에선 해외의 위스키 원료 값 인상과 인건비·물류비 등 제반 비용이 올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수입사 관계자는 “가격 인상 횟수나 규모는 해외 위스키 제조 본사의 의지가 개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오히려 수입사는 국내 소비자 반발을 우려해 인상을 억제하다 불가피하게 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한 중소 규모 도매상은 “도매상이 전국에 300개 정도이기 때문에 특정 도매상이 함부로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며 “수입 원가를 아무도 모르니, 수입사가 위스키 가격을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위스키 마니아들, 글로벌 호구 됐나
익명을 요구한 주류 업계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사이 해외에 한국 위스키 시장이 호황이란 얘기가 다 퍼져, 본사에서 올릴 수 있는 만큼 바짝 올리자는 기조가 강해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한국이 일명 ‘글로벌 호구’가 됐다는 것이다. 한 주류 업체 관계자는 “외국의 위스키 소매 가격도 최근 1~2년 사이 소폭 올랐지만, 국내 인상 폭은 이를 훨씬 웃돈다”고 말했다.
특히 국내 명품처럼 위스키 업계가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늘어, 수입사들이 배짱 영업을 한다는 시각도 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나 일부 인터넷 카페에서 위스키가 재테크 수단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도 가격 인상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깜깜이 인상이 계속되는 동안 위스키 수입사들은 지난해 역대급 이익을 냈다. 발렌타인을 유통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최근 회계연도(2021년 7월~2022년 6월)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6.6% 늘어난 395억원이었다. 발베니·글렌피딕 등을 수입하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94.7% 증가한 184억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