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경기 부진에 도산기업이 늘어나는 등 불황의 여파가 현실화하면서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올해 투자은행(IB)의 진짜 경쟁력이 드러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의 자금 수요가 확대되는 가운데 비교적 손쉽게 수익을 내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 위축됐기 때문이다. 정통 IB로 불리는 기업금융에서 증권사 간 진검승부가 예상된다. 증권사들도 관련 조직을 강화하는 등 채비를 마쳤다.
통상 불경기엔 증권사 ‘IB맨’이 바빠진다. 생존을 모색하는 기업의 자금 조달과 구조조정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은행과 달리 증권사 IB는 채권 발행이나 증자(增資)를 통해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돕는다. 기업이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자금을 끌어 쓰려면 이 물량이 시장에 원활히 유통돼야 하는데, 이를 돕는 것도 증권사 IB 조직이다.
◇ 도산기업 사상 최대… 기업 자금 수요 급증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국내 기업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만큼 차갑다. 정책 자금으로 연명하던 한계기업이 줄이어 도산하는, 이른바 ‘코로나 청구서’도 올해 본격적으로 날아온다. 기업들이 전대미문의 코로나 충격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낮은 금리의 정책 자금 덕분이었다. 위기를 버틴 기업이 자생력을 가지려면 내수가 회복돼야 하는데, 지난해 말 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내수 회복은커녕 오히려 더 심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벼랑 끝에 선 기업 상황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해(1~11월) 전국 도산 기업 수는 2729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중소기업이 법원에 신청하는 법인 파산신청은 1745건, 회생신청이 984건이었다.
3년간 번 돈(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이른바 ‘한계기업’도 계속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한계기업 비중이 16.4%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지난해 더 늘어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나마 회사채 시장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다. 당장은 ‘연초 효과’로 회사채 발행에 나선 기업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환율 상승의 영향으로 비우량 회사채의 경우 충분한 자금을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경우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은행은 오히려 코로나 직후 대규모로 풀어놓은 정책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금이 절실한 기업은 메자닌(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 등) 발행이나 증자, 자산 매각을 포함한 구조조정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 불경기에 일감 늘자 IB 조직 강화한 증권사
업종을 불문하고 기업 경기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일감이 늘어나는 곳은 증권사다. 기업의 자금 조달과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 등을 관할하는 증권사의 IB 부문은 기업 유동성 상황이 악화해 자금 수요가 늘어날수록 호황을 맞이한다.
증권사들은 이미 조직 개편을 통해 IB 부문을 대폭 강화했다. KB증권·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 등은 인수합병(M&A)·기업공개(IPO)·DCM(채권발행시장)·ECM(주식발행시장) 등 기업금융 조직을 강화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대형사뿐 아니라 SK증권·LS증권 등 중소형사도 IB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부실 여파로 관련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단기에 높은 수수료 수익을 내던 고위험 PF 사업이 위축된 상황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몇 년 전까지 부동산 PF 조직을 강화했던 증권사들은 기업금융 조직 강화로 방향을 틀었다. 대표적인 곳이 메리츠증권이다. 메리츠증권은 최근 정통 IB 전문가로 불리는 정영채 NH투자증권 전 사장과 함께 송창하 NH투자증권 전 신디케이션 본부장을 영입했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신용등급에는 드러나지 않는 기업의 성장성과 리스크를 제대로 평가해 선별하고, 기업이 발행한 부채(채권)를 투자할 만한 상품으로 만드는 게 IB의 역할”이라며 “증권사의 IB 실력은 오랫동안 기업금융 분야에서 잔뼈를 다지면서 키워지기 때문에 단기간 확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증권사의 IB 역량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