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하락세가 가팔라지면서 보유세 과세 기준인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보다 높아지는 아파트 단지들이 속출하고 있다. 집값은 수억원씩 떨어졌는데 이달 고지될 종합부동산세는 집값이 떨어지기 전인 올해 연초 기준으로 부과된다는 의미다. 지난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됐던 ‘과속 인상에 따른 가격 역전’ 현상이 현실화한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역대급 조세 저항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집값 급락에 공시가·실거래가 역전
6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엘스 84㎡(이하 전용면적)는 올해 8월과 지난달 각각 19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호갱노노가 집계한 해당 면적의 올해 공시가격은 19억8500만원이다.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보다 3500만원 높은 것이다. 인근 레이크팰리스 84㎡도 지난달 말 17억9500만원에 거래돼 실거래가가 공시가격(18억2600만원) 밑으로 떨어졌다. 인천 연수구 송도동 송도더샵센트럴시티 60㎡도 공시가격(5억3600만원)보다 낮은 5억500만원에 지난달 거래됐다.
실거래가와 공시가격이 거의 같아진 사례도 많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그라시움 59㎡는 최고가(15억3000만원)보다 5억원 가까이 낮은 10억6000만원 거래 사례가 지난달 나왔다. 이 단지의 공시가(10억2400만원)와 비슷해졌다. 노원구 상계동 보람아파트 44㎡도 실거래가(4억원) 대비 공시가격(3억5900만원)의 비율이 90%에 육박한다.
실거래가가 공시가격 수준까지 떨어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 단지와 인근 단지 입주민들은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종합부동산세 같은 보유세는 올해 1월 1일 기준 공시가격에 따라 부과되기 때문에 집값은 빠졌는데 세금은 작년보다 더 많이 내야하기 때문이다. 잠실의 한 대단지 아파트 주민 장모(40) 씨는 “정부가 집값 안정시켰다고 홍보하면서 세금은 과거의 비싼 가격으로 매긴다면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강동구 고덕동에 거주 중인 권모(46)씨는 “대출 금리가 오르면서 매달 내는 이자도 수십만원 늘었는데 세금까지 더 내게 되면 부담이 두 배”라고 말했다.
◇”무리한 현실화 정책 폐기해야”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무리한 공시가격 현실화 정책이 부동산 침체기와 맞물려 기형적인 역전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문 정부는 2020년 11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에서 시세의 70% 수준인 아파트 공시가격을 2030년까지 시세의 90% 수준으로 높이기로 했다. 당시에도 전문가들은 “조세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과거 정부가 공시가격을 시세의 70% 이하로 유지했던 것은 집값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공시가와 시세 간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공시가격 현실화 정책의 부작용 가능성을 인지하고 1주택자 공시가격을 동결하거나 종부세 비과세 기준을 한시적으로 11억원에서 14억원으로 상향하는 등의 보유세 완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대부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향후 집값 추가 하락에 따른 납세자 혼란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내년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올해와 같은 71.5%로 유지하기로 했다. 현실화율이 동결됨에 따라 올해 집값 하락분이 내년도 공시가격에 반영되면 내년엔 보유세 부담이 줄어들 전망이다. 다만 올해 공시가격을 수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달 종부세 고지서가 발송되고 나면 집값이 많이 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반발 여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수연 한국감정평가학회장(제주대 교수)은 “공시가격 산정의 기준이 되는 시세가 납세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개선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