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40위 태영그룹의 모태이자, 국내 시공 순위 16위 건설사인 태영건설이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을 신청한 28일 건설업계에선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나왔다. 건설사 자금 담당 부서들은 온종일 채권 은행을 접촉하며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만기와 건설현장 상황 등을 점검했다. 부동산 호황기였던 2018~2022년 상반기까지 건설사들은 공격적으로 부동산 PF 대출을 받으며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산 PF 시장도 얼어붙다시피 했다. 20대 건설사 관계자는 “올해는 신규로 나온 부동산 PF가 거의 없었고, 계속 만기를 연장하며 버텨 왔다”며 “언제 터져도 터질 부동산 PF 부실이 현실이 됐다는 이야기가 업계에서 나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 위기감 확산
지난해 말 레고랜드 사태 여파로 연초부터 건설업계에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일부 건설사들이 실제 도산했지만, 대부분 지방 소재 중소 건설사여서 파장은 작았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다르다. 이날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소식이 알려지자 중대형 건설사들 사이에선 “우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시공능력평가순위 30대인 이른바 ‘1군 건설사’들도 삼성물산·현대건설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감을 따내기 위해 발주처인 시행사의 PF 대출에 연대 보증을 선다. 요즘처럼 고금리와 공사비 급등으로 착공을 못 해 PF 대출을 갚을 수 없게 되면, 결국 보증을 선 건설사들이 빚을 감당해야 한다. 한 30위권 건설사 임원은 “땅값이 최고점이던 2021년부터 2022년 상반기 사이에 과도하게 건설했던 지식산업센터나 생활형 숙박시설에 주력한 기업들이 특히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미분양 리스크가 큰 지방 건설현장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10월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 5만8299가구 중 5만972가구(87%)가 지방에 몰려있다. 미분양 우려로 착공을 못 하고, 이 때문에 분양을 통해 대출을 갚는 길이 막히니 PF가 점점 부실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충남에서 주상복합 개발사업을 위해 500억원을 PF 대출로 조달한 한 시행사 관계자는 “공사 착공이 예정보다 1년 넘게 밀리면서 지난 5년 회사 수익을 모두 이자로 날렸다”며 “땅을 팔려고 해도 사겠다는 곳도 없다”고 말했다.
◇내년 상반기가 고비
건설업계는 “내년 상반기 중 PF 위기가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PF 만기 연장을 독려하던 정부가 최근 ‘옥석 가리기’로 선회하면서, 4월 총선 이후 수익성이 떨어지는 현장에 대해선 브리지론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신용평가(한신평)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국내 대표 건설사 16곳이 PF 대출에 대해 보증을 선 금액은 총 28조3000억원으로 2020년 말(16조1000억원)에 비해 75% 늘었다.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건설사들이 고스란히 물어줘야 할 돈이다. 국내 건설사들의 순차입금도 2018년 4000억원, 2021년 1조4000억원에서 올해 9월 10조5000억원으로 급증했다. 한신평은 “2022년 말 이후 PF 대출 부실에 대응하기 위해 미리 현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차입금(빚)이 더 늘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회사채도 불안 요인이다. 한신평에 따르면 국내 상위 50대 건설사가 발행한 회사채 약 2조5000억원의 만기가 내년 상반기 중 도래한다. 일부 건설사들은 이미 회사채 금리와 직결되는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 3대 신용평가사 모두 태영건설의 신용등급 전망을 낮췄고 동부건설, 신세계건설도 재무 건전성을 이유로 일부 평가에서 신용등급 또는 전망이 떨어졌다.
다만 태영건설의 부도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와 같은 건설사 연쇄 도산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김승배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은 “금융위기 때와 비교하면 미분양 상황이 심각하지 않고, 규모가 있는 시행사나 건설사들은 지난 부동산 호황기 때 곳간을 채워뒀기 때문에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PF 대출 부실이 공급 부족으로 이어져 집값 상승을 부추길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PF 시장 혼란이 장기화되면 결국 건설 시장이 얼어붙고, 주택 공급 급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금융기관들이 건설사나 시행사를 상대로 상식을 벗어나는 이자를 받는 사례가 없는지 정부가 꾸준히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