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부동산 신탁사 중 자본력이 가장 우수한 한국토지신탁의 신용 등급이 부실 자산 규모 증가로 한 단계 강등됐다. 신탁사는 자금력이 떨어지는 토지 소유자(시행사)로부터 토지를 위탁받아 인허가, 시공, 분양, 입주 등 부동산 개발 전반을 대신 해주고 수수료를 받아 돈을 번다. 시행사나 시공사가 자금난을 겪어 공사를 끝마치지 못할 경우 신탁사가 책임을 지고 자금을 확보해 준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부터 고금리와 공사비 급등으로 중소 건설사의 부도가 잇따르자 준공 책임을 떠안게 된 신탁사에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신탁업계 관계자는 “현재 부동산 개발 10건 중 2~3건은 신탁사가 책임을 떠안는 구조”라며 “건설업계의 위기가 신탁사로 옮아갈 경우 부동산 개발 시장은 사실상 ‘올스톱’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책임 준공 수탁액 3년 새 2배 급증

한국신용평가는 최근 한국토지신탁의 신용 등급을 ‘A’에서 ‘A-’로 한 단계 강등했다. 지난해 부동산 경기 침체로 수주 실적이 줄어든 데다, 부실 자산 규모가 부동산 신탁사 14곳 가운데 가장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한국토지신탁의 고정이하자산은 4398억원으로 2022년 말보다 535억원 늘었다. 고정이하자산이란 사업장의 분양률이나 공정률 등을 감안할 때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져 채권 회수에 상당한 위험이 있는 자산을 뜻한다. 미분양 규모가 크거나, 시공사 부도 등으로 공사가 중단돼 분양 대금이 정상적으로 회수되지 않는 사업장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그래픽=백형선

신탁사들은 부동산 상승기에 수수료율이 높은 차입형 토지 신탁이나 책임 준공형 토지 신탁(책준신탁)을 경쟁적으로 수주하며 몸집을 불려왔다. 차입형 토지 신탁 수탁액은 2020년 12월 8조7000억원에서 작년 9월 11조9000억원으로 37% 늘었고, 책준신탁 수탁액은 같은 기간 8조4000억원에서 두 배 수준인 17조1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차입형 토지 신탁은 신탁사가 직접 금융사나 시공사에서 사업비를 조달하는 신탁 방식을 뜻한다. 분양 실적이 저조하거나 공사가 지연되면 신탁사의 자금 사정이 단기간에 악화할 수 있다. 책임 준공형 토지 신탁은 사업비는 시행사가 조달하지만, 시행사나 시공사가 공사를 끝마치지 못할 경우 신탁사가 책임을 지고 준공하거나 PF 대출을 대신 상환해야 하는 신탁 방식이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이던 2019~2021년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2022년 하반기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책준신탁은 일반적으로 개별 시공사 신용만으로는 자금 조달이 어려운 중소 건설사들이 참여하는데, 치솟은 공사비와 미분양 급증에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중소 건설사의 부도와 부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폐업한 건설업체는 1948곳으로,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부실 사업장에 빌려준 돈 ‘4조’ 규모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건설사들이 시공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면서 신탁사가 대신 투입하는 돈도 급증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부동산 신탁사 14곳의 신탁 계정 대여금(부실 사업장에 신탁사가 투입한 자체 자금)은 작년 9월 기준 4조800억원으로, 2022년 말 2조5000억원에서 3분기 만에 63% 늘었다. 이 돈이 미분양 등의 이유로 제때 회수되지 못하면 신탁사 손실로 처리된다. 신탁업계 관계자는 “현재 신탁 계정 대여금이 투입된 사업장이 물류센터나 지식산업센터, 오피스텔 등 비(非)아파트가 대부분이라 자금 회수가 더욱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했다.

신탁사 부실이 현실화할 경우 수분양자가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 다른 사업장이나 돈을 댄 금융사에도 리스크가 연쇄적으로 전이될 수 있다. 오지민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은 “2022년 이후 책임 준공형 토지 신탁 사업장에 참여한 시공사가 부도·파산 선고를 받거나 공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시공사의 신용도가 낮은 사업장이 대부분이라 리스크 현실화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고 했다.